시각장애인들 안내견도움 백두산 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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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처음엔 한반도에서 제일 높은 저 산을 어떻게 오를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

지난 25일 정상인들도 오르기 힘든 백두산을 맹인안내견의 도움을 받아 등정한 시각장애인 3명은 그렇게 세상을 향해 힘껏 외쳤다.

대구대에 재학 중인 김기철(金幾哲.27.영어교육4).김대운(金大運.27.사회복지3).노영관(盧永官.23.경제금융보험2)씨 등이 그 주인공.

이들은 1992년부터 맹인안내견 사업을 벌여온 삼성화재 부설 맹인안내견학교가 제11회 세계 맹인안내견의 날(26일)을 기념해 마련한 이번 행사에서 국내 28명의 안내견 사용자를 대표해 백두산에 도전하게 됐다.

이들의 눈과 같은 안내견 창공.재미.토담이 앞장서고 삼성화재 관계자 등 20여명이 뒤를 따랐다.

어둠이 막 걷힌 이날 오전 6시30분 백두산의 중국쪽 길목인 옌볜(延邊)자치주 안투(安圖)현 이도진에서 산행은 시작됐다. 최대 목표는 천지 부근의 백운봉(해발 2천6백60m)까지, 이것이 여의치 않을 땐 흑풍구(黑風口.해발 2천1백여m) 부근까지 오르기로 했다.

5월 초까지 눈이 내린다는 백두산은 허벅지까지 쌓인 눈으로 길을 분간할 수 없었다. 안내견들은 어렵사리 눈속을 헤치며 길을 잡았지만 도심에서 적응훈련을 받은 이들로서는 능숙할 수 없었다. 수없이 미끄러지고 눈속에 파묻히면서도 장애인들과 안내견들은 굳세게 앞으로 나아갔다.

오전 11시, 백두산에서도 가장 바람이 세다는 흑풍구에 이르자 이내 백두산은 그 거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화창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불과 1m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세찬 눈보라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안내견들도 주인의 신변에 위협을 느꼈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등정을 시작한 지 5시간 만에 백운봉을 불과 2백여m 앞둔 해발 2천4백여m 지점에서 '세계 맹인안내견의 날' 행사를 치르고 돌아서야 했다.

이날 행사에선 올해 초 제정된 장애인복지법 제36조에 따라 보건복지부장관이 발급한 '보조견 표지' 가 처음으로 이들 3인에게 전달됐다. 이 표지가 있으면 공공시설과 편의시설에 보조견과 함께 들어가는 것이 허용된다.

세계 맹인안내견협회 켄로드 회장이 전세계 31개국 2만여마리의 맹인견을 대표해 보낸 축하전문도 낭독됐다.

김대운씨는 "정상에 오르지 못해 아쉽지만 이번 등정이 많은 시각장애인에게 힘을 주고 안내견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

백두산〓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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