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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인터뷰]"희귀 영인본이 내 인생 결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한국학 관련 사료의 디지털화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많은 학자가 CD롬 타이틀이나 파일로 된 사료 데이터를 가지고 컴퓨터로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

하지만 30년 전만 해도 한국학 연구자들의 재산목록 1호는 사료'카드'였다.

공부 많이 한 사람, 좋은 논문 쓸 사람의 표지는 바로 보관된'카드' 장수가 많고 분류정리 능력이 앞선다는 것이었다.

'이 '카드' 는 자신이 도서관 등지에서 한장 한장 손으로 써서 만들다가 복사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차 복사한 것을 오려 붙이는 방식으로 바뀌어 갔다.'

그런데 정말 긴 호흡의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카드' 만들기보다 사료가치가 높은 선현들의 고서(古書), 그리고 희귀본이 돼버린 학술저서 원본을 직접 구해 대조해 보면서 학술논문을 작성하려는 노력이었다.

개인 소장은 물론 도서관 소장 고서도 빌려보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영인본 출판사는 한국학 전공자의 이런 필요를 채워주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존재였다.

당시 한국학 전공자가 그다지 많지 않았으므로, 국학관련 영인본을 내는 출판사도 아세아 문화사와 경인문화사가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방대한 연대기 출간은 국가적 사업으로 가능했지만 아세아 문화사의 고려사.고려사절요, 경인문화사의 삼국사기.여유당전서.25사 및 많은 개인문집의 영인본 출간은 이후 수많은 한국학 관련 논문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확실한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필자의 경우 조선후기 정조 탕평책을 충실하게 보좌한 채제공의 '번암선생문집' 영인본을 사서 읽어본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돼 지금 조선후기 정치사 전공자가 됐다.

대부분의 선.후배 국학자들이 관련 영인본 덕분에 민족문화 영역의 전공자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는 크고 작은 추억들을 가지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국학자뿐 아니다.

사실 1970~80년대를 대학 교정에서 지낸 많은 사람은 최루탄 가스와 영인본 팔던 분들의 추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데모대 속에서 만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추억의 크기 때문에 신경숙씨의 '딸기밭' 같은 소설의 배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박광용 교수.가톨릭대 인문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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