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루이 17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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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감옥 습격은 프랑스대혁명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왕정이 이 때 바로 철폐된 것은 아니었다.

입헌군주제를 추구하는 온건개혁파 덕분에 왕위를 지키던 루이16세가 국외탈출 시도, 외세개입 유인 등 거듭된 배신행위로 국민의 분노를 산 결과 3년 후 왕정이 철폐되고 그 이듬해에 왕과 왕비가 단두대에 오르게 된다.

1793년 1월 루이16세가 처형되자 왕당파는 감옥 안에 있던 여덟살짜리 왕자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 불쌍한 소년은 루이17세라는 이름만 가졌을 뿐, 왕 노릇은 해보지도 못한 채 참혹한 감금상태 속에서 2년 후 병으로 죽었다.

20년 후 나폴레옹 패퇴 뒤에 왕위에 오른 소년의 숙부를 루이18세로 부르는 데서 루이17세의 존재는 확인될 뿐이다.

그런데 감옥에서 죽은 이 소년이 진짜 루이17세가 아니란 소문이 일찍부터 떠돌았다. 왕당파가 루이17세를 감옥에서 빼돌려 국외로 탈출시켰고, 감옥에서 죽은 소년은 그 대역이라는 것이었다. 이 소문에 의탁해 루이17세를 자칭하는 인물이 그후 유럽 각지에서 수십명 나타났고 소문의 진위를 따지는 책만도 수백권이 나왔다.

현대 유전학이 2백여년 묵은 이 문제의 해결에까지 나서고 있다. 벨기에 루벵대의 카시망 교수와 독일 뮌스터대의 브링크만 교수는 DNA분석 결과 죽은 소년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소생으로 확실시된다는 공동연구 결과를 며칠 전 발표했다.

분석에 쓰인 재료는 왕비와 그 친척 몇 사람의 머리카락, 그리고 죽은 소년의 심장이었다. 소년의 심장이 어떻게 남아 있었을까. 그 사연이 또한 기구하다.

소년의 검시에 참여했던 펠레탕이란 이름의 의사가 기념품으로 가지려고 심장을 훔쳐가지고 나온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펠레탕은 왕정복고 후 루이 18세에게 이 심장을 보내려 했지만 받아주지 않아서 파리 대주교에게 맡겨놓았다.

1831년 소요사태에 주교관이 휩쓸렸을 때 그릇이 깨져 마루바닥에 며칠씩 버려져 있다가 펠레탕의 아들에게 돌아갔고, 그가 죽을 때 유언에 따라 왕가 후손의 손으로 넘어간 것이 1백년전의 일이다.

돌같이 단단하게 말라붙은 이 심장이 과연 1795년 6월 탕플감옥에서 죽은 소년의 것인지도 확언하기 어려운 곡절이 이렇게 쌓여 있다. 그러나 DNA분석이 심장의 주인과 마리 앙투아네트 사이의 친연관계를 확인해 준다면 모든 의문이 풀리는 셈이다.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한 어린 왕자의 원혼(寃魂)이 늦게나마 과학의 도움으로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풀릴 것 같아 보이지 않던 역사의 수수께끼도 언젠가 뜻밖의 방법으로 풀릴 수 있음을 새삼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역사 앞에 숙연함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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