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외국어고, 정치적 계산의 희생양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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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우선 제1안은 외고의 학생 수와 시설을 과학고 수준으로 조정해 외고를 존속시키겠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외고생의 수는 현재의 절반에도 못 미치게 돼 결국 학생들의 등록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립 외고는 문을 닫아야 한다. 제2안은 아예 외고를 폐지하고 국제고나 자율고 또는 일반고로 전환하는 안이니 재론의 여지조차 없다.

이제까지 진행돼 온 외고에 대한 논란은 폐지, 혹은 보완을 전제로 한 존속으로 요약된다. 폐지론자들은 외고를 사교육의 원흉으로 규정하고, 존속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선발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외고 교육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그런데 이번 공청회를 지켜본 사람들은 교과부가 전자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미 교과부의 주무 과장은 “간판만 바꿔 달고 요건만 완화할 수는 없다”고 단호하다. 하긴 교과부라고 마음 편할 리는 없을 것이다. 외고 논란의 불씨를 지핀 여당의 실세라는 국회의원이 연구팀의 제안을 ‘미봉책’이라고 혹평하고 국회에서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으니 말이다.

외고가 그간 경직된 고교 평준화의 틀 속에서 교육의 수월성과 다양성에 기여한 점은 더 이상 거론치 않으려 한다. 이런 논의들은 폐지론자들에게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여기서 필자는 외고에 대한 논란이 지나치게 정치화되어 가는 점을 경계하고자 한다. 이 여당 의원은 외고를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자신이 정의의 사도가 돼 이를 퇴치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지난 정권부터 일관되게 외고 폐지를 외쳐온 야당 의원들은 이에 침묵의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이들의 주장대로 외고는 사교육의 원흉인가. 단순히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특정 학교의 존폐를 문제 삼는다면 아마도 폐지 대상의 영순위는 서울대가 돼야 할 것이다. 외고 이외에도 전형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자사고와 과학고 역시 사교육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외고 졸업생의 낮은 어문계 진학률을 문제 삼는 것은 역시 또 하나의 억지일 뿐이다. 결국 외고생들의 대학전공학과는 어문계에 국한돼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는 자유에 대한 엄청난 제약이다. 게다가 탁월한 외국어 능력은 외교·통상·국제법 등의 분야에서도 절실히 필요하다.

결국 외고 폐지를 외치는 정치인들이 본 외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반고에 비해 좋은 대학진학률이다. 이들은 폐지론이 외고를 시기(猜忌)하는 학부모들의 표를 모을 수 있다고 계산하는 듯하다. 인기에 목숨을 거는 정치인들에게 외고 폐지론은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듯 대중적 시기심을 이용하는 것은 정치인의 정도가 아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인기에 영합하는 교육정책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와 인재 양성을 위한 비전이다. 외고 폐지에 목청을 높이는 정치인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번에 교과부의 용역을 맡았던 연구진 중 외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의 소유자가 있었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자칫 공정성에 대한 시비로 비화될 수도 있다. 외부 용역보다는 교과부가 직접 나서서 대책 수립에 부심하는 모습이 더 보기 좋았을 것이다.

이성호 중앙대 교수·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