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의 창업일기] 융자 지원받아 새 삶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가장의 실직.부도나 가출로 졸지에 노부모.자식의 생계를 떠안게 된 주부, 안보 관련 강사로 일하다가 일거리가 줄어 음식점으로 새출발한 벌목공 출신의 북한 귀순자, 험한 고철 수집업을 하면서 자활을 꿈꾸는 20대 미혼모….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사람들이 창업을 통해 다시 일어선 사례집이 만들어진다.

신용보증기금은 밑바닥 인생, 소외된 서민의 외환위기 극복 일화를 모아 단행본으로 펴내기로 하고 지난달부터 지점별로 사례를 수집하고 있다.

신용보증기금은 원래 중소 제조업체의 신용도를 평가해 은행 대출용 보증서를 끊어주는 일을 주로 해온 공공기관.

이런 곳에 서민들의 눈물겨운 사연들이 쏟아진 것은 실직자와 그 가족의 갱생을 도우려고 정부가 지난해 7월 '생계형 창업 특별보증' 업무를 시작하면서부터.

전국 76개 지점은 생활고로 처자식과 동반 자살까지 생각한 사람, 노숙자 신세라도 면해보려는 이 등 벼랑 끝에 몰린 인생들로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9개월동안 이 기관의 신용보증서로 은행 융자를 받은 사람은 모두 6만7천4백여명. 총 보증금액은 1조8천억원으로 한사람당 2천7백만원꼴로 융자받았다.

처음 지원 업무를 성가시게 여겼던 창구 직원들도 점차 보람을 느끼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과 삶의 의지가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의 한페이지를 차지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종성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은 "일확천금으로 들뜬 벤처 열풍의 이면에서 외환위기의 아픔을 온몸으로 버텨낸 보통 사람의 이야기가 잊혀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면서 "이들의 재기 사례를 모으는 것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재활을 위한 용기와 방법을 불어넣고 알려주자는 것" 이라고 설명했다.

신용보증기금이 취합한 수백건의 성공사례를 보면 '첨단' 과는 거리가 있는 '아날로그' 업태가 대부분. 도소매.수리업이 41%로 가장 많고 제조업과 숙박.음식업이 그 뒤를 이었다.

지난해 10월 서울 길동에 '함흥 성천강 냉면' 이라는 북한 음식점을 차린 한창권(39)씨는 북한 귀순자 출신. 한의사였지만 먹고 살기가 힘들어 우즈베키스탄에서 2년동안 벌목공으로 생활하다 1994년 귀순했다.

처음엔 학교.회사 등지에서 북한 실상을 알리는 안보 강사로 뛰었는데 일거리가 점차 줄어 생계가 막막해졌다.

그러다가 지난해 7월 신용보증기금의 도움으로 은행에서 1억원을 빌려 음식점을 차린 뒤 요즘엔 하루 평균 70만원의 매상을 올리는 어엿한 식당주인으로 변신했다.

남편은 출판사 직원, 자신은 은행원으로 단란한 맞벌이 가정을 꾸려온 李모(52)씨 부부는 구조조정의 여파로 몇달 간격으로 실직자 신세가 됐다.

전세를 월세로 옮기고 그나마 월세를 못내 쫓겨날 정도로 고생했는데, 친정 어머니의 닭요리 솜씨를 무기로 경기도 반월에 닭 한마리 칼국수집을 내 자립에 성공했다.

전업 주부였던 李모씨(46)도 중소기업체 사장이었던 남편이 부도를 내고 가출하는 바람에 시부모와 자녀 세명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는데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으로 은행 돈을 꿔 판촉물 도매상을 차렸다.

두살박이 아들을 둔 미혼모 張모(24)씨는 집안에서도 따돌림당해 아기 우유값도 대기 어려웠는데 생계형 창업지원으로 대전에 고철 수집점을 차렸다.

중견 한국화가 朴모(58)씨는 공무원인 남편이 순직한 뒤 경기도 시흥에 나래패션이라는 여성 의류점을 차려 자립에 성공한 경우. 뇌성마비 장애인이지만 시집을 내는 등 시인의 꿈을 키워온 황지욱(36)씨는 은행 돈 3천만원을 빌려 PC방을 차렸다.

생계형 창업 보증 업무를 시작하면서 '직업도, 담보도 없는 서민들이라 돈을 떼이는 일이 많지 않을까' 창구 직원들이 걱정했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신용보증기금이 보증선 일반 중소업체의 부도율이 평균 4%인데 비해 생계형 창업 보증제도 시행 후 이 도움으로 창업한 서민 가운데 문닫은 경우는 5백여건으로 전체의 1%에도 못 미쳤다.

이 사업의 보증 재원은 2천억원으로 이 금액의 15배(3조원)까지 보증설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일회성 공공근로사업에 투입된 수조원에 비해 적지만 6만여명의 창업에 15만명 정도의 고용창출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됐다.

생계형 창업 특별보증은 오는 6월 말까지 계속된다.

관내에 서민이 많다는 서울 강동지점은 그동안 수천건의 상담이 몰려 가장 몸살을 앓은 곳으로 꼽힌다.

이 지점 심관섭 과장은 "경험이 없는 업무가 폭주하는 바람에 불평도 많았지만 우리 지원을 받아 창업한 사람들이 고맙다며 개업 떡 등을 들고 찾아와 콧날이 시큰했던 게 한두번이 아니다" 고 말했다.

홍승일 기자

◇ 알림〓 '보통사람의 창업일기' 는 앞으로 매주 수요일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