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 문화코드 2000] 6. 시를 읽는 사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1955년 10월초 서울의 어느 요릿집. 조병화 시인과 극작가 이진섭씨, 정음사의 최일해 사장 등이 조시인의 새 시집에 실릴 시를 낭독하고 있었다.

동석한 기생들은 물론, 다른 방에 있던 기생들까지 몰려들어 환호했다.

시집은 아직 표지도 못 만든 가제본 상태였지만 기생들이 너도나도 집어가는 바람에 들고갔던 10여권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6.25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있었던 로맨스를 그린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 의 인기예감이었다.

정음사는 당초 1천부를 찍으려던 계획을 수정해 11월초에 초판으로 2천부를 펴냈으나 1주일만에 동나버렸다. 이후 4년간 10만부가 팔려나갔다.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드문 일이 시작된 것이다.

50년대에 확인된 한국인의 시에 대한 감수성은 80년대 들어 1백만~2백만부가 팔리는 시집들을 등장시켰다.

베스트셀러 연간 순위에서 서정윤의 '홀로서기' 와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이 87년 1.2위, 88년 1.3위를 각각 차지했다.

이보다 앞서 85년에는 이해인 수녀의 시집들이 종합순위 2~4위를 휩쓸었다.

90년대 들어 이런 열풍은 수그러들었지만 팔리는 물량은 여전히 엄청나다.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는 1백만부,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은 80만부가 팔렸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지난해 국내에서 팔린 시집은 6백만부가 넘을 것" 으로 추정했다. 이 곳에서 팔린 20만부의 시집을 교보문고의 출판시장 점유율 3%로 역산한 수치다.

시가 이렇게 대중적 인기를 끌고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우리는 대형서점은 물론, 서너평 짜리 책방에도 빠짐없이 시집코너가 있다. 미국.유럽.일본.남미 등을 통틀어도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서울대 영문과 김성곤 교수는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시는 대중성이 없는 고급예술" 이라고 전제하고 "출판사들이 출간을 꺼리는데다 시집이 나와도 한정판을 찍어 동호인끼리 돌려보는 수준" 이라고 말했다.

"일반 서점에는 진열조차 되지 않으며 문학전문 서점에 가야 찾아볼 수 있을 정도" 라는 것이다.

지난해 단행본 판매량이 7억9천만부에 이르는 '출판왕국 일본' 에서도 시집 판매량은 미미하다.

일본의 문화 월간지 '창' (創)4월호는 특집 '출판사의 철저연구' 에서 "이바라기 노리코의 '의지하지 않고' 는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10만부나 팔려나갔다" 고 밝힐 정도.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에세이 '오체불만족' 이 4백40만부가 팔린 것과 대조를 이룬다.

남미도 마찬가지다.

신경림 시인이 98년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열린 '세계 시인대회' 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민중적 서정시집 '농무' 가 30만부 팔렸다고 소개하자 남미의 스페인어권 시인들이 "0을 하나 더 붙인 것 아니냐. 3억명을 상대로 시집을 내는 우리도 상상할 수 없는 일" 이라고 놀라워했다.

한국은 '시의 나라' 다. 시집이 많이 읽히고 시인들의 활동도 활발하다. '프로 시인' 만이 아니다. 아마추어 작가의 등용문인 주요 신문 신춘문예엔 해마다 각각 3천명이 넘는 이들이 몰려든다.

아무나 붙잡고 "좋아하는 시가 있느냐" 고 물어도 윤동주의 '서시' , 김소월의 '진달래 꽃' ,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 이육사의 '광야' , 김광균의 '설야' , 정지용의 '향수' 라는 대답이 쉽게 나오는 나라다.

좀 젊은 층이면 김수영의 '풀' ,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 정현종의 '섬' , 황지우의 '겨울나무에서 봄나무에로' , 곽재구의 '사평역에서' ,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 이성복의 '남해금산' 등을 너나없이 댄다.

한국에서 시가 유난히 많이 읽히는 데에는 민족성과 역사적 전통, 열악한 문화환경으로 인한 교양에 대한 갈증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성곤 교수는 "감성이 여리고 쉽게 감동하는 민족정서와 과거시험도 한시로 치를 정도로 문장을 중시하던 유교적 전통이 함께 작용한 것" 으로 분석했다.

고은 시인도 "시는 노래의 일종이므로 예부터 가무를 즐긴 우리의 민족성과 어울린다" 고 말한다.

반면 문화평론가 이성욱씨는 "교양이라든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깊은 것에 대한 갈증을 채워줄 인프라가 달리 없는 탓에 시에 치중하는 것" 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우리는 서구와 달리 각종 문화예술활동을 직접 하거나 접하면서 교양에 대한 욕구를 채울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다" 면서 "시집을 혼자서 읽는 것이 가장 간편한 대안" 이라고 해석했다.

김용옥의 노자강의가 어려운 내용임에도 일반인들에게 인기몰이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 배경이 무엇이든 시를 사랑하는 나라는 마음이 순수하고 맑은 사람들의 나라일 것이다.

공자가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 을 엮은 뒤 "시 삼백편이 한마디로 마음에 조금도 나쁜 일을 생각함이 없다(思無邪)."고 말한 이치다.

이성복 시인은 아포리즘집 '그대에게 가는 먼 길' 에서 "그대는 문학을 하겠는가. 그대는 이 땅의 신비를 아내로 삼겠는가. 그대는 언어의 사물화를 위하여 이 깊은 밤의 침묵이 되겠는가" 라고 묻는다. 이 물음에 가슴이 설레는 사람이 많은 한 시에 대한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조현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