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지마비로 쓰러진 뒤 9개월 그가 다시 신경과 교수로 돌아왔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1면

전범석 교수가 연구실에서 국제학회 발표 내용을 스피커로 들으면서 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그에게 갑작스레 사지 마비가 찾아온 건 초여름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던 주말 오후였다. 여느 때처럼 남한산성 등산로를 걷던 그는 벌봉 정상에서 일순간 정신을 잃고 통나무처럼 앞으로 쓰러졌다. 곧바로 정신을 차렸지만 경추(목뼈)를 다쳤고, 사지가 마비됐다. 고혈압도, 심장병도 없는 건강 체질이었고, 발을 헛디딘 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쓰러진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전범석 교수에게 5년 전 닥쳤던 불행은 그렇듯 우연히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악몽 같은 재앙을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했다. 9개월 뒤, 기적처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등산 도중 목뼈 다쳐 …헬기로 응급 후송

의식이 또렷해지면서 전 교수는 어깨 사이로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아래로 뻗쳐 내려가는 걸 감지했다. 이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순간 경추 손상으로 사지가 마비됐음을 알았지만 냉정함을 유지했다. 다행히 산행을 함께한 후배가 옆에 있었다. 그는 곧바로 후배와 주변 등산객에게 자신의 지시를 따라 달라고 부탁했다. 우선 목을 움직이지 않은 채, 다리와 몸을 붙잡고 엎드린 몸을 뒤집는 일이 급했다.

자세가 편해지자 그는 동행한 후배를 통해 서울대병원 응급실을 연결했다. 그리고 담당 레지던트에게 “ 경추 손상으로 사지 마비 상태니 헬기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 상황에서 들것에 실려 내려갈 경우 경추 손상이 가중돼 회복의 길은 멀어진다. 도착한 헬기는 척추수술의 대가인 신경외과 김현집 교수가 있는 분당서울대병원으로 내달렸다.

척수가 손상되면 그 부위 아래는 마비된다. 전 교수처럼 목 부위 척수가 손상되면 어깨 아래쪽이 마비되고, 감각이 없어진다. 또 자율신경계에도 이상을 초래해 배뇨도 곤란해지고 혈압 조절도 안 된다.

따라서 넘어져 엎드려 있는 환자, 원인은 몰라도 길에 쓰러진 환자를 발견했을 땐 ‘정신 차리라’며 흔들지 말아야 한다. 목뼈 손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 목을 부목으로 고정시키고, 병원으로 이송해야 한다.

터진 디스크 제거 수술 … 발가락만 ‘까닥’

응급실에서 찍은 자기공명영상촬영(MRI) 검사에선 경추 3번과 4번 사이의 디스크가 터져 척추관이 좁아져 있는 게 확인됐다. 사진과 전 교수의 상태를 진찰한 김 교수는 “이대로 방치하면 2~3일 이내에 부기가 진행돼 상태가 악화할 것”이라며 “속히 디스크 제거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터진 디스크를 제거한 뒤 위·아래 척추를 고정하는 수술은 오후 8시에 시작돼 다음 날 새벽 3시가 돼서야 끝났다. 수술은 잘됐지만 나아진 것은 없었다. 오른쪽 발가락만 까닥할 수 있을 뿐 사지 마비는 계속됐다.

혈압이 190㎜Hg까지 올라가는가 하면 잘 땐 호흡 곤란 증상까지 나타났다. 대변은 관장으로, 소변은 방광에 줄을 꽂아 해결했다.

절망과 암흑의 상황에서 전 교수는 6개월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생명을 건져도 재활에 실패하면 먹고 배설하는 일조차 남에게 의지해야 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일단 모든 좌절과 원망은 접고 자립할 방법에만 매진하겠다’고 결심했다. 곧 중환자실에서 물리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재활 운동 계획도 세웠다. 수술 후 만 3일째 되는 날이다.

“회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물리치료지만 중환자실에선 생사 문제에 집착해 후순위로 밀리기 쉽죠.”(전 교수)

그날부터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재활 치료에 매달렸다. 한 달 뒤, 어설프게나마 그는 설 수 있었다. 소변도 줄을 뺀 상태로 볼 수 있게 됐다. 기적의 햇살이 확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재활치료 외에도 혼자 하루종일 운동

일어 선 뒤에도 일상에 복귀하려면 혼자서 걷고, 몸단장을 하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일이 가능해져야 한다. 병원에서 받는 재활치료는 하루 1시간의 물리치료와 작업치료, 주 2회 허용되는 수중치료가 전부다. 그래서 그는 이외의 시간엔 온종일 종이 접기·수건 접기·공 던지기·호두 만지기·걷기 등을 혼자서 매일 반복했다.

전 교수는 “신경이 완전히 절단된 상태가 아닌 한 손상된 신경도 조금씩은 회복도 가능하며, 특히 재활치료를 통해 손상 부위 주변의 신경세포를 활성화하면 상당 부분 기능을 대신할 능력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실제 미련할 만큼 반복한 재활 운동은 그에게 거듭된 기적을 보여줬다. 2004년 6월 5일, 사지 마비 상태로 입원했던 전 교수는 이듬해 3월 1일, 불편하지만 걸어서 퇴원하는 기쁨을 맛봤다. 하룻밤을 가족과 집에서 보냈고, 3월 2일부터 지금까지 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로 복귀해 일을 한다.

그는 복귀 후 SCI 논문만 48편 발표했다(올해 12편). 외래 진료도 1주일에 네 번씩 한다. 또 국내 최초의 파킨슨 센터도 운영한다.

그는 더는 등산하러 다닐 수 없다. 하지만 지하철로 출퇴근하며, 집과 사무실에서도 책을 보거나 국제학술대회 연자의 발표 내용을 들으면서 기구를 이용한 운동을 매일 한다.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는 불행. 그는 이런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상황을 인정한 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찾아 실천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최근 중환자실에서 구술로 남긴 병상 일지를 정리해 『나는 서있다』(예담) 라는 책을 출간했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신인섭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