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식 국가서 육식 국가로 바꿨다” … 룰라의 삼바 매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외신들은 연일 “브라질에 마법의 시간이 도래했다”고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경제위기에서 회복하는 속도도 다른 나라보다 빨랐다. 지난 10년간 브라질은 외채 대국에서 순채권국으로 전환됐다. 2008년에는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S&P와 무디스로부터 투자적격 등급을 받아 체질 개선까지 했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64) 대통령의 국정 운영 지지도가 80%까지 뛰어올랐다. 경이로운 기록이다. 과연 브라질의 시간이 도래한 것일까. 브라질의 성공사례를 토론하기 위해 마르셀리노 보틴 재단이 마련한 국제회의가 11월 초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렸다.

“초식 국가에서 육식 국가로 바뀌고 있다.” 스페인 산탄데르 그룹의 전략분석연구소 소장 호세 후안 루이스는 브라질의 변화를 짧고 강렬하게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브라질 대기업들은 이미 ‘물티라티나’로 변신하고 있다. 물티라티나는 중남미계 다국적 기업이라는 뜻의 현지어다. 세계 6위의 에너지 메이저인 브라질의 페트로브라스는 이미 오대양 육대주를 누빈다. 라틴 아메리카의 최대 건설사 오데브렉트는 20여 국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07년 매출액은 170억 달러로, 이는 볼리비아와 파라과이의 국내총생산(GDP)을 합친 것보다 많다. 가만히 앉아서 외국의 메이저에 커피와 철광석을 넘기던 과거의 브라질이 아니라 공세적으로 국제 무역의 큰손으로 뛰어든 것이다. 우리나라와도 거래가 많은 광산기업 ‘발리 리우 도시’ 등은 브라질의 대국화(大國化) 속도와 방향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정책의 연속성과 국운의 상승=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했을까. 전 세계 브라질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이유 중 대표적인 것이 브라질 정부의 정책 연속성이다. 룰라 정부는 카르도주 전임 대통령의 정책을 하나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거시경제의 안정기조가 안착됐고, 정권교체 때마다 지불했던 불확실성의 비용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최근의 국운 상승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실제로 브라질의 성장률은 아르헨티나나 칠레만 못했다. 안정기조의 경제운영은 고금리, 저환율 체질을 고착시켰다. 첨단 제조업 부문의 국제 경쟁력을 갉아먹었다. 상승하는 운세에 절묘하게 올라타는 행운이 찾아왔다. 2002년 취임해 재선에 성공한 룰라 대통령의 집권기는 브라질의 국운 상승기다. 그의 임기 중 중국발 특수가 꾸준히 있었다. 브라질의 심해저 유전에서는 대량의 석유와 가스가 터져 나왔다. 그는 국제무대에서 브라질의 국격을 최대로 높이는 전방위 외교를 수행하며 국내외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2014년 월드컵, 2016년 여름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유연함과 조화의 달인=룰라는 묘책을 잘 찾는 정치인이다. 선거공약에서 약속한 농지개혁과 ‘생산자 천국’ 주장은 거의 성과가 없었다. ‘기아 제로’ 구호만 약속대로 실천했다. 좌파들은 그의 절충주의를 배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국정지지도는 80%에 이른다. 해답은 개혁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무원연금법 개혁이 2002년 취임 이후 집권 1기 동안 가장 큰 개혁이었다. 2006년 재선에 성공하며 출발한 집권 2기에서는 이렇다 할 개혁사안이 없었다. 하지만 국정의 투명성을 크게 높이면서 보이지 않는 변화를 추구했고 국민들은 이런 점에 후한 점수를 줬다.

먼저 그는 선거일 직전 국제 금융권과 국내 기득권층을 흔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브라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전임 정부의 경제 틀과 국제적 약속을 모두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실천에 옮겼다. 이에 따라 국내외 금융권이 안정을 찾으면서 외국인투자가 계속 증가했다. 브라질의 신인도도 함께 올랐다. 정책의 연속성이 가져다 준 과실의 수혜자가 바로 룰라였다.

재정 부문의 여유분을 ‘가족기금’으로 돌려 빈곤층 1100만 가구에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기아 제로’라는 선거구호를 실천한 것이다. 가족기금은 빈곤층 자녀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내수시장을 확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룰라 정부는 조만간 ‘휴대전화 기금’도 마련해 1100만 대의 휴대전화를 공짜로 나눠줄 예정이다. 매월 7헤알(약 5000원)의 요금까지 정부가 부담한다. 비판론자들은 선거용 전략이라고 비난하지만 업계는 통신시장이 확대된다고 크게 반기고 있다.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잘 조화시키는 것이 룰라의 장기다. 문제는 없을까. 발전론자들은 고금리와 고평가 체질을 벗겨내지 못하면 성장률을 올릴 수 없는 딜레마를 지적한다. 현재 경제위기에서 빠르게 회복되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잠재적 성장률을 하락시킬 수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현재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로 관심을 보이는 것도 향후 성장 가능성이 큰 석유와 가스 부문, 수력발전소 프로젝트, 인프라 투자, 대두와 바이오 관련 농업투자, 주택 건설업이다. 주로 에너지·건설·농업에 집중돼 있다. 대통령 3선이 금지된 브라질에서 룰라의 뒤를 이을 새 정부의 고민 역시 제조업과 서비스 부문의 경쟁력을 제고하면서 해외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대국굴기를 향한 공세적 외교=11월 온실가스 문제로 프랑스 파리에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회담을 하기로 한 룰라 대통령은 마음이 한층 가벼웠다. 지난 1년간 아마존의 파괴 면적이 7000㎢로 과거 23년 사이에 가장 낮은 수치였다. 전년도에 비해 45%나 줄어들었다. 브라질은 국제무대에서도 능력 있고 책임감 있는 국가로 존중받고 있다.

아울러 남미에서 메르코수르(남미남부공동시장)를 강화하고 우나수르(남미국가연합)의 창설을 주도해 남미의 맹주임을 과시했다. 인도-브라질-남아공(IBSA) 포럼을 통해 남남협력의 틀도 강화했다. 아랍과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브라질 외교는 다자무대와 지역외교에서 대국(大國)외교를 지향한다. 브릭스(BRICs) 회담을 통해 러시아·중국 같은 대국과도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면서도 브라질은 미국·유럽과의 파트너십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브라질의 수출구조는 EU 22%, 미국 18%, 아시아 15%, 라틴 아메리카 23%로 나뉘어 구미에 대한 비중이 큰 편이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브라질이 남남협력에 공을 들이고 있지만 경제적인 비중은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라틴 아메리카에 러시아·중국·이란의 발걸음이 부쩍 잦아지고 있다. 콜롬비아에는 곧 미군 기지 7개가 들어선다. 브라질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다극화되는 국제정세 가운데 브라질의 대국굴기 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성형 서울대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HK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