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릴케 전집 국내 첫 출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주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 드리우고/들판에 바람 풀어 놓아 주십시오. " ( '가을날' 중)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국내 시인들에게 끼친 영향도 큰 대표적인 외국시인이다.

그러나 평론가 김주연(숙명여대.독문학)씨는 "릴케의 시는 이해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릴케 시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고 말한다.

이름이 알려진데 비해 릴케의 작품이나 그에 대한 평론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한 이유다.

릴케는 2천여편의 시와 '말테의 수기' 같은 산문, 그리고 여러 편의 소설과 희곡을 썼으나 국내에는 일부만 번역됐다.

독일문학을 전공하는 젊은 학자들이 이처럼 띄엄띄엄 소개돼온 릴케의 거의 모든 작품을 새로 번역하고 비평을 곁들여 '릴케 전집' (책세상.전13권)을 내놓았다.

열세권 가운데 1.7.9.12권이 최근 출간됐고, 나머지 아홉권도 올해 안에 모두 나올 계획이다.

1권은 '기도시집' 과 초기의 시들, 7권은 단편소설, 9권은 희곡, 12권은 산문소설 '말테의 수기' 로 꾸몄다.

나머지 9권에는 후기의 시와 프랑스어로 쓴 시들, 시작노트.산문.유고 등이 실린다.

1권을 옮긴 김재혁(고려대.독문학)교수는 "릴케는 독일 현대문학의 출발점으로 세계문학사에서 중요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일찍 소개돼 김춘수씨에서부터 최근 이성복씨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주어왔다.

그의 순수한 서정과 낭만적 세계관은 특히 우리의 감성에 잘 맞는데, 지금까지는 그 일부만 소개돼 아쉬움이 많았다" 고 말했다.

릴케의 별칭인 '장미의 시인' '사랑의 시인' '나그네 시인' 등은 모두 우리 감성에 쉽게 와닿는 것들이다.

그는 장미를 유난히 사랑했고, 많은 연인을 사랑했으며, 평생동안 유럽 전역을 방황하면서 살았고, '노래의 신' 오르페우스를 노래했다.

릴케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별칭에 어울리는 삶을 부여받았다.

오스트리아제국 군인이었으나 출세를 포기하고 역장(驛長)이 된 아버지와 상류사회에 뛰어들지 못한 데 대해 불만을 잔뜩 품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결국 부부는 곧 헤어졌고, 어머니 품에서 자란 릴케는 부모를 모두 싫어했다.

릴케는 16세 무렵 연상의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진 이래 평생 여러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고 그 여인들의 배려속에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여인은 14살 연상의 루 살로메. 남자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다.

릴케는 러시아 장군의 딸 살로메와 러시아를 여행한 뒤 "러시아는 나의 고향이다. 위대하고 신비한 이 담보물로서 나는 살아가고 있다" 고 말했다.

러시아가 그에게 준 것은 광활한 자연과 원초적 생명력, 짙은 민족성과 독실한 신앙심 등이었다.

로댕을 만나고서는 "그의 위대성은 마치 코 앞에 우뚝 솟은 탑처럼 우리 앞에 치솟아 있다" 고 격찬했다.

로댕은 자신의 비서였던 릴케에게 조각가처럼 사물을 깊이 관찰하고 끊임 없이 형상화하는 자세를 가르쳤다.

그 결과 릴케의 작품은 모든 자연과 사물에 대한 순수한 애정, 사물의 본질을 찾으려는 관찰과 형상화라는 특징을 가진다.

그가 숨진 뒤 서구철학계에서 실존주의가 하나의 사조로 자리잡으면서 그에게는 '실존주의의 선구' 라는 별칭도 붙었다.

그의 대표작 '가을날' 은 "지금 혼자인 사람은…(중략)나무잎이 구를 때면 가로수 사이를/이러저리 불안하게 방황할 것입니다" 로 끝난다.

사물의 본질을 강조하며, 혼자 남은 개인이라는 존재의 불안은 바로 실존주의의 핵심이다.

그는 1927년 1월2일 그의 시세계를 압축하는 묘비명을 남기고 그 아래 묻혔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그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누구의 것도 아닌 잠이고픈 마음이여"

오병상 기자

<릴케 연표>

▶1875년 프라하에서 태어남.

▶1884년 부모 이혼.

▶1891년 메리슈 - 바이스키르헨 육군고등실업학교 중퇴.

▶1894년 첫 시집 '삶과 노래' 출간.

▶1895년 프라하대학 입학. 두번째 시집 '가신에게 바치는 제물' 출간.

▶1897년 루 살로메와 만남. 그녀의 권유로 '라이너' 라는 독일식 이름 사용.

▶1899년 루 살로메와 러시아여행. 톨스토이와 만남. 베를린으로 이주.

▶1901년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결혼.

▶1902년 로댕과 만남. '형상시집' 출간.

▶1905년 '기도시집' 출간.

▶1914년 1차대전 발발. 독일로 돌아가면서 파리의 재산 모두 잃게됨.

▶1916년 6개월간 군복무(전사편찬위원회).

▶1922년 '두이노의 비가' .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 집필.

▶1926년 12월29일 백혈병으로 사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