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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고비키’를 빚는 39세 도공의 10년 집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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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도자기는 불의 미학이다. 아무리 뛰어난 도공도 불의 조화를 모르면 명품을 기대할 수 없다. 송기진 씨가 밤새 가마를 지키며 혼신을 다해 불을 지피는 이유다. 불의 다스림을 거쳐 태어난 덤벙이들이 아름답기만 하다.(오른쪽 사진)

모든 예술이 그렇듯,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 때 잡념이란 있을 수 없다. 딴생각이 털끝만치라도 끼어들면 대번 일그러지고 짜부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 것 아닌 것 같은 그릇 하나도 알고 보면 공명과 이익의 세계를 초월한 지고(至高)의 경지를 담고 있게 마련이다. 특히 명품일수록 더욱 그렇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소장한 국보급 찻사발 #이만훈 기자의 사람 속으로 - 보성의 도예가 송기진

도자기는 과학이 아니다. 현대과학이 매달려 아무리 상세히 파헤치고 매달려도 그 옛날 만들어진 것과 같은 명품을 아직 만들어내지 못하지 않나? 도자기는 지(地)·수(水)·화(火)·공(空)을 도공의 혼으로 빚어 탄생되는 자연이다. 아니, 우주정신이다. 일본의 차인들에게 ‘고려다완(高麗茶碗)’은 종교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고려다완이라 함은 오래 전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찻사발을 일컫는 말로, 실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네들이 ‘이도(井戶)’라고 부르는 것을 비롯해 무늬·외관·산지 등에 따라 구분되는 종류만 줄잡아 스무 가지가 넘는데, 수십 점이 일본의 국보 및 문화재로 지정돼 있을 정도다.

그 중에서도 다완의 지존으로 대접받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이도. ‘다완의 결정판’으로 불리는 일본 국보 ‘기자에몬(喜左衛門)’, 다이묘가 성(城) 대신 바쳤다는 ‘쓰쓰이쓰쓰(筒井筒)’ 등 명품 이도는 지금도 보험금만 수십억 엔을 넘는다. 이도와 함께 일본인들로 하여금 사족을 못 쓰게 하는 또 하나의 명품 찻사발은 ‘호조고비키(寶城粉引)’.

그릇 전체를 백토로 칠해 붙여진 분청자인데, 임진왜란을 전후해 일본에 전해져 그저 ‘고비키’라고 불리다 일제 때부터 주요 산지인 전남 보성의 이름이 덧붙여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가 소장(三好粉引)했을 뿐 아니라 일본 다도계에서 국보급으로 치는 대명물(大名物), 중흥명물(中興名物)로 각각 2점, 1점이 지정돼 있을 정도다. 이 밖에도 36점이 명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호조고비키’와 ‘보성덤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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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같은 일본 내에서의 명성과 달리 국내에서 호조고비키에 대한 대접은 형편없다. 일부 차인과 도예가, 그리고 골동품을 취급하는 고미술계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이 한심한 상황을 보다 못해 호조고비키의 부활을 위해 10년째 몸을 던져 고민하는 이가 소장 도예가 삼전(三田) 송기진(39) 씨다. “말로는 누구나 우리의 도자기문화가 세계 도자사(陶瓷史)에서 우뚝하다고 하면서 정작 외국에서 그토록 칭송받는 문화유산을 나몰라라 방치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호조고비키의 우리말 이름은 ‘보성덤벙이’다. 송씨가 2006년 문예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실시한 ‘일본에서 국보 및 문화재가 된 조선사발의 우리 이름 찾아주기’를 통해 새로 붙인 이름이다. 그릇 형태를 만들어 백토물에 덤벙 담갔다 꺼내 희게 장식하는 도자기 제작 기법 이름을 딴 것으로, 원로 도예인들의 자문을 받은 결과다.

그가 보성덤벙이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2000년 봄. 미술대학원을 마치고 이미 전통 다완의 재현작업을 시작한 터여서 보성의 차 전문가에게 차와 관련해 자문을 구하던 중 “일본에서 유명한 호조고비키는 바로 보성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에는 워낙 이도다완에 빠져있던 참이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하지만 그해 보성에 가마를 짓기로 하면서 ‘덤’으로나마 덤벙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잘만 하면 지자체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지만, 지역문화발전에 기여하면서 자신의 작업도 할 수 있다면 ‘꿩 먹고 알 먹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그해 겨울 그는 후배와 함께 조선시대 가마터가 있는 보성군 득량면 도촌리로 들어갔다.

방을 하나 얻어놓고 이듬해 3월까지 도요지를 뒤지며 사금파리와 씨름했다. 뭔가 감이 잡히는 듯했다. 그래서 도촌리에서 나온 지 한 달 만인 2001년 4월 근처에 녹차밭이 펼쳐져 있는 보성읍 봉산리에 가마를 짓고 ‘보성요(寶城窯)’라는 이름으로 요장을 열었다. 하지만 섣부른 생각이었다.

겨우내 보고 느낀 것이 많아 작업을 시작하면 곧바로 ‘작품’이 나올 줄 알았지만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기자에몬 이도’를 흉내내 봤지만 모양새나 색감 모두 진품과 거리가 멀었다. 처음으로 시도한 덤벙이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여 시행착오 끝에 막무가내로 해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좀 더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아예 간판을 ‘보성다완연구소’로 바꿔 달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조선 사발에는 나름의 탄생비밀이 있을 터. 그 비밀을 알아내려면 옛날 선조들이 한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우선 재료부터 새로 챙겼다. 장흥·보성 일대의 옛 도요지를 찾아 다니며 점토를 구하고 유약용 백토나 물토를 찾아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특히 유약의 경우 소나무재와 떡갈나무재, 사질 점토 등의 배합비율을 달리해 가며 정답(?)을 찾아내려 무진 애를 썼다.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 그해 12월 목포에서 연 ‘보성분인다완 재현 및 창작품’ 전시회였다. 하지만 이 또한 엉터리였다.

“솔직히 저는 그때 보성덤벙이를 어느 정도 재현해 냈다고 생각했어요. 한데 막상 보니 아닌 거예요. 나름대로 똥을 싸도록 애써 만든 작품인데 아무리 뜯어봐도 정감이 가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작가란 놈이 제가 만들어 놓고도 이것을 왜 좋아하는지 의문도 가고요. 그저 분만 칠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 그럴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보성다완연구소 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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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자각은 이듬해인 2002년 작품전을 준비하면서 송씨의 작품세계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는 기폭제가 됐다. 이도다완도 덤벙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이도다완은 흙에 비밀이 있는 줄 알았는데 덤벙 기법을 써야만 특유의 특징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죠. 이도의 비파색을 재현해 내려고 이것 저것 해보다 결국 성공했는데, 그게 바로 덤벙 기법이었거든요. 정말 그릇에 대해 너무 모르는 상태에서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지만, 당시까지 아무도 몰랐던 비밀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경상도에서 만든 황덤벙이가 이도다완이요, 전라도에서 만든 흰덤벙이가 고비키인 것이죠.”

결국 그해 12월 ‘전남보성분인다완과 정호다완의 상관전’이라는 타이틀로 보성 군립 백민미술관에서 연 초대전은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시련이 닥쳐왔다. 목포전시회가 끝나면서 그동안 함께 일하던 후배들이 떠나버린 것이다. 도자기를 해서는 밥을 먹고 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겨울 내내 혼자 술을 퍼 마시며 고민했다. 하지만 이대로 그만둘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해보자. 대신 한국에서 하지 말고 일본에 나가서 해보자고 결심했다.

“일본에 아는 사람도 없고 일본말도 할 줄 몰라 무조건 일본 한국대사관에 메일을 보내 일본에서 전시회를 하고 싶다고 했죠. 대사관에서 답장이 왔는데 문화원 소관이라고 해서 연락했더니 아라키란 사람이 교류전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우여곡절 끝에 2003년 7월 가즈아키 이노세 등 일본인 5명과 함께 주일 한국문화원에서 교류전을 가졌습니다.”

난생처음 작품을 싸 들고 일본으로 가 전시회를 했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저는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고 여겼는데, 일본인들이 보기에는 안 된 거예요.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말을 들은 것이 고작이에요.”소득이라면 일본인들의 ‘짜디짠 평가’와 함께 도쿄(東京) 신바시(新橋)에 있는 쿄갤러리에서 이듬해 초대전을 열기로 약속을 받은 것이었다.

그해 12월에는 ‘송기진의 일본 국보가 된 조선사발 연구’가 도자기분야로는 처음으로 진흥기금지원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70~80점을 준비해 2004년 2월 다시 일본으로 갔으나 파리만 날리다 돌아와야 했다. 8개월 뒤 다시 갔을 때는 반응이 좋았다.

“갤러리에 찾아온 사람들이 제가 옆에 서 있으니까 짐꾼인줄 알고 작가를 찾기에 저라고 했더니 ‘정말이냐? 놀랍다’고 입을 모으더군요.”

하지만 10월 전시 역시 작품으로는 성공했지만 전시회로서는 실패였다. 돈이 없어 차까지 팔아 갔는데 정작 작품 매매는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귀국하자마자 송씨는 도자기를 그만두기로 맘먹었다. 전 해에 결혼해 딸까지 둔 가장으로서 도자기를 해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꾸미지 않은 자연적인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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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덤벙이의 생명은 뭐니뭐니해도 덤벙질이다. 백토가 너무 두껍거나 얇게 발라져서는 안 된다.
두 달쯤 지났을까? 사정이 생겼다. 우연히 아는 사람이 찾아와 “작품전 팸플릿을 봤다”며 “이도다완을 세 점 만들어 줄 수 없느냐”고 하는 것 아닌가?

처음으로 받는 주문이기도 했지만, 알아주는 것이 우선 고마웠다. 귀가 솔깃했다. 아내와 딸을 친정으로 보내고 다시 흙을 잡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주문받은 것은 이도인데, 막상 하려니 덤벙이 쪽으로만 쏠렸다.

하는 수 없이 전에 만들어 놓았던 작품을 대신 주고 덤벙이 작업을 계속했다. 극한상황이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그래서였을까? 이듬해 6월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차문화대전에 이노세와 함께 출품한 그의 작품들은 국내 마니아들로부터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깊은 좌절 끝에 얻은 평가여서 두 배로 기뻤다.

“한 걸음에 처가로 달려가 아내한테 말했습니다. 너무 깊숙이 들어와 어쩔 수 없이 계속해야겠노라고요.”

식구들을 데려와 작업을 하니 마음이 새로웠다. 그해 10월에는 ‘일본 국보와 문화재가 된 조선사발에 우리 이름 찾아주기’사업을 신청해 또다시 문화예술진흥기금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 남들은 한 번도 어려운 기금을 두 번이나 받은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행운은 이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선조들이 했던 덤벙이 기법을 완전히 터득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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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진 씨가 마지막으로 세벌구이 할 덤벙이들을 가마 안에 넣고 있다.

“너무 벅찬 주제여서 2006년 들어 원로 도예 선배님들을 찾아 뵙고 자문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하동에서 길성요를 하시는 원당 길성 선생님도 그 중 한 분인데 3월쯤 찾아 뵈니 덤벙이를 열심히 하라는 격려와 함께 당신의 비법을 알려주시는 거예요. 제가 그동안 해오던 것과 다른 방식이어서 집에 와서 해보니 과연 기가 막혔습니다. 작품을 만든 뒤 찻물을 부어 하루가 지나자 차심이 들면서 꽃으로 피어나는데 정말 예쁘더라고요.”

하지만 송씨가 원당 선생의 지도를 바탕으로 선조들의 기법을 온전하게 되살리는 데는 1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무안덤벙이는 옹기와 같이 한번 소성하는 데 비해 보성덤벙이는 세 번 소성시킵니다. 무안덤벙이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방식인 셈이죠. 그래서 보성덤벙이는 백자가 되고 싶어하는 분청사기라는 표현을 쓰는 겁니다. 특히 덤벙이는 뭐니 뭐니 해도 분을 어떻게 그릇에 붙이는지가 핵심인데, 한 번에 붙이느냐, 두 번에 붙이느냐, 혹은 생지에 붙이느냐 등 방식이 여러 가지입니다. 초벌구이를 한 다음 덤벙질을 할 때 분이 너무 두꺼우면 떨어져버립니다. 적당한 두께로 한방에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게 하는 것이 기술입니다.”

송씨가 흙과 씨름을 시작한 것은 1989년 군산대 산업디자인과에 입학해 도자공예를 전공하면서부터. 당시에는 도예가가 되기보다 도예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학부시절에는 도자 조형에 매달렸는데, 어느 날 문득 일시적 흥미를 위한 작업보다 영원성이 있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정신적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 바로 사발이었다. 사발이란 감상을 위해 모시는 ‘죽은 작품’이 아니라 늘 일상에서 함께하는 ‘행복의 도구’라는 생각에서였다. 일단 목표가 세워지자 대한민국에서 제일 훌륭한 스승을 모시는 것이 문제였다.

대상은 일찍이 조선사발에 뛰어들어 이미 명성이 자자한 문경의 도천 천한봉 선생이었다. 하지만 무조건 찾아가 가르침을 받자 해도 생뚱하게 여길 뿐 쉽사리 가르쳐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모교 대학원에 들어갔다. 학위논문 준비를 구실(?)로 한 전략이었다. 천 선생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미 논문 제목도 ‘한국 전통다완의 연구-천한봉다완을 중심으로’라고 정해놓은 뒤였다. 천 선생은 여느 사람과는 달랐다. 대부분 어느 분야든 일가를 이루면 자신만의 비법 운운하며 곁을 주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그분은 다정다감했다. 취지에 공감했는지 그 자리에서 허락했다. 꼬박 1년간 천 선생을 공부했다.

작업 방법이며 유약을 어떻게 만들어 사용하는지 등 사발을 만드는 것과 관련한 것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일일이 적고, 사진과 비디오로 기록했다.

“제가 지금 이나마 조선사발이 어쩌고저쩌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그때 천 선생님한테 배운 덕분입니다.”

천 선생을 통해 조선사발에 대해 이론적 바탕을 마련한 송씨는 대학원을 마치면서 국내는 물론 일본의 유명 요장들을 찾아가 더욱 폭 넓은 공부를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교수의 꿈을 버리지 못한 송씨는 마침 아는 선배가 모 대학에 신설되는 도자기공예과의 강의를 맡으면서 부르는 바람에 조교로 들어갔다.

신생 과였던 만큼 할 일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작업을 해 연말이면 어김없이 작품전을 열고는 했다. 그렇게 두 가지 일을 함께하면서 2년을 보내자 한계가 느껴졌다. 작품을 할 것이냐, 학교 일을 할 것이냐 선택을 해야 했다. 결국 조교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그릇을 만들기 위해 보성에 가마까지 지었다.

그가 작업지로 보성을 택한 것은 완전히 우연. 2000년 가마를 짓기 위한 터를 찾아 합천·양산·문경 등 전국을 헤맸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없던 차에 그해 늦여름 경남 하동의 쌍계사 계곡을 다녀오는 길에 어둠 때문에 자동차가 골짜기에 빠진 것이 계기가 됐다. 다음날 차를 꺼내러 갔다 운무에 싸인 채 가지런히 산자락을 장식한 차밭 풍경에 넋을 놓고 바라보던 송씨는 무릎을 쳤다.

그래 바로 여기야!“고향과는 가까운 곳임에도 보성에 차밭이 그렇게 크고 많은 줄 몰랐습니다. 밭이라고 하니 그저 채마밭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렇게 아름다운 줄도 몰랐고요. 더구나 그 일이 있기 얼마 전 일본에서 유명한 호조고비키가 바로 보성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을 들은 터여서 이곳이 적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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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진 씨의 보성요.

감각 지키려 한 해 스물두 번 불 때기도

송씨는 요즈음 보성차밭으로 유명한 봇재 자락에 살며 작업하고 있다. 고개 너머에서 재작년에 옮겨왔다. 작업은 찻사발 위주로 매일 스무 점 정도씩 한다. 오늘 만든 것은 말려서 모레쯤 초벌구이를 하고, 초벌구이가 끝난 것은 덤벙질하는 식이다. 매일 60점씩은 만지는 셈이다.

그가 이같이 작업하는 것은 매일 만들어야 기능이 늘기 때문이다. 한달 반짝 하고 몇 달 쉬고, 또 반짝 하고 몇 달 쉬고 하면 기능이 늘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으로 터득한 결과다. 그렇게 하다 보니 옛날보다 조형성 등에서 완성도가 높아졌다.

“덤벙이를 만드는 과정은 다른 도자기와 비슷합니다. 일단 그릇 형태를 만들어 건조한 뒤 초벌구이를 하고 덤벙질을 한 다음 두벌구이를 합니다. 그 다음에 유약을 발라 세벌구이를 하죠. 이 중에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하고 어려운 것은 역시 덤벙질입니다. 그릇 하나 만드는 데 대충 한 달 걸립니다.”

송씨는 대충 가마당 200점 정도 넣고 불을 땐다. 다른 이들은 600점이 기본인데, 그는 앞칸에만 세벌구이 작품을 넣기 때문이다. 뒤칸은 초벌구이를 하는 데 쓴다. 왕창 만들어 한꺼번에 불을 땔 수도 있지만, 혼자 하기에 벅차기 때문에 매일 조금씩 만들어 과정을 연속하는 것이다. 보통 일 1년에 대여섯 번 불을 지핀다. 많게는 한 해 스물두 번 땐 적도 있다.

“많이 땔 때도 가마를 꽉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실험을 하느라 그런 것입니다. 당시에는 감각을 이어가기 위해 불작업을 잇달아 세 번씩 했어요. 불 때기가 마지막 단계로 무척 중요한데 어쩌다 한 번 하면 불의 세기라든지 그릇 놓는 위치라든지 하는 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죠. 몇 백 점 넣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 한두 점이라도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사기쟁이에게는 좋은 흙이 절대적이다. 요즘 송씨는 점토를 보성 득량면 도촌리 옛 도요지 근처에서 가져다 쓴다. 도촌리 산 전체가 분청사기에 알맞은 맥반석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산자락 등에서 풍화한 흙을 퍼다 쓰는 것이다. 유약도 도촌에서 캔 물토에 소나무재와 꼬막 껍데기를 태워 만든 가루를 섞어 만든 것을 쓴다.

2000년 충분한 양을 만들어 놓고 숙성시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백토는 수입품을 쓴다. 국내에서도 고령토(카올린)가 나오지만 양도 얼마 안 되고 질이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릇 하나 만드는 데 한 달 걸려

“덤벙이는 분청사기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분청사기는 청자와 달리 쉽게 만들어졌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산허리나 논바닥에 흙이 점질만 있으면 된다 이겁니다. 기와를 만들 때도 쓰죠. 보성덤벙이가 유명한 것은 그 바탕색이 검기 때문이에요. 덤벙이가 만들어진 곳의 산 전체가 맥반석으로 이뤄져 있어요. 도촌리에는 지금도 맥반석 광산이 있어 침대도 만들고 그래요. 맥반석에 철분이 많아 특히 검습니다. 보성 일대의 흙이 일반적으로 철분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도촌리 것이 특히 많죠.”

송씨는 도자기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남다르게 했다. 보통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복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송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그렇게 몇백 년을 해왔음에도 못해내는 것을 보면 잘못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재현하고 싶은 작품을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들여다보고 느낌부터 챙긴 뒤 그 느낌을 살려내는 방식을 택했다.

맨 처음 매달렸던 기자에몬 이도의 경우 한 달 동안 들여다보면서 느낀 것은 자유와 편안함이었다. 그래서 그 정도의 자유스러움을 주는 그릇을 만들려면 스스로 내 마음부터 자유스러워지고 편안해져야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마음공부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릇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사발이 자장면 그릇만해지기도 하고, 손자국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공부를 거듭하면서 이 또한 자의식이 들어간 작위(作爲)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다시 여느 사발을 닮은 작품이 빚어졌다.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지만 그제야 칭찬이 쏟아졌다.

“2006년 광주에서 ‘보성덤벙이연구발표전’을 할 때 다른 사람한테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고현 조기정 선생님(지난해 작고)께서 오셨는데 부축한 제자에게 제 작품을 들어보라고 하시고는 ‘이 정도면 경지에 오른 것’이라고 말씀하셨대요. 고현 선생님은 도천·원당 선생님과 함께 제게는 대선배이자 큰 스승님으로 청자 연구의 선구자이십니다.”

지난 5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송씨의 작업장에 느닷없이 일본인 두 명이 한국인 안내인을 앞세우고 들이닥쳤다. 40여 년 동안 고려다완 재현에 매달려온 도예가 다나카 사치로와 오사카(大阪)의 유명한 도자기 전문 갤러리인 구로다도엔(黑田陶院)의 구로다 구사오미 회장이었다.

작업장을 둘러보던 다나카가 함박웃음을 짓더니 이내 엄지를 치켜세우며 “코리아 넘버원”을 외치자 안내인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의 도요지 답사차 내한해 유명 요장들을 둘러보면서도 덤덤해하던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구로다도엔은 ‘고비키’ 전문 컬렉터만 해도 수천 명을 관리하는 갤러리다.

하지만 송씨는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보성덤벙이의 제작기법은 100% 되찾아냈다고 자신하지만, 작품은 옛날 선조들 솜씨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고백이다.

“기법은 되나 최고의 미에는 한참 떨어집니다. 숙련된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이죠. 그 이유는 분업과 조기교육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기막에 들어가면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사기막에 들어가 최고의 장인들이 하는 것을 분야별로 일일이 보고 배워 그 분야의 최고의 장인이 되고, 어른이 돼서는 또다시 자식대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런 과정을 통해 기술을 전수했죠. 그런데 지금은 고작 몇 년 하고 장인입네 하는 판이니 그런 최고의 기능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이런 대물림 시스템이 임진왜란 전까지 이어졌습니다. 일본의 국보나 대명물이 된 것들의 대부분이 임란 이전 작품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몇 백 년 동안 명품 조선사발을 재현하려고 했지만 지금까지 족탈불급인 것이 바로 그 때문이죠. 하물며 고작 몇 십 년밖에 안 된 우리나라로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옛 작품을 흉내낼 수는 있을지언정 그 깊이와 맛은 한참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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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진 씨가 잘 나온 작품을 뜯어보며 흐뭇해하고 있다.

선조들 솜씨에는 아직 못 미쳐

송씨는 “조선사발, 그 중에서도 덤벙이는 자연을 닮았다”고 말한다. 옛 선조들은 주위에 있는 자연을 퍼다 그저 그릇을 만들었을 뿐, 이러저러한 그릇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두고두고 봐도 질리지 않으면서 간단히 베낄 수 없다는 분석이다. 그런데도 이런 ‘보물’을 막사발이라고 부르는 데 대해 그는 분노한다.

“일본 전시 때였어요. 도쿄대 예술과 교수가 학생들을 데리고 와 보면서 ‘조선사람들은 참 무식하다. 조선사발의 가치를 모르고 막사발로 썼다. 우리가 차를 하면서 그 가치를 발견해 국보로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어떻게 너희가 국보로 받드는 조선사발을 만든 사람들을 그렇게 폄하할 수 있느냐? 그런 수준의 작품이 나오려면 그만한 수준 속에서 나오는 것인데 함부로 말하면 되는가? 다만 그것을 향유하는 층이 조선에서는 서민층이었고, 너희는 그런 도자기문화가 없었음에도 지배계층이 그것을 향유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 아니냐? 그러고는 일본에서 제일 그릇을 잘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고 했더니 가토 도쿠로라는 이름을 대요. 그러면서 생전에 한 해에 딱 네 작품만 파는데 작품 한 점에 1억원씩 받고 팔았다고 하기에 작품집을 보니 그 사람이 재현했다는 작품보다 내 작품이 더 낫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1억원씩 붙여버렸죠. 돈이 문제가 아니라 조선 도공의 후예로서 자존심 때문에 그런 것이었습니다.”

송씨는 이듬해 코엑스 전시에서도 사발 하나에 3000만원씩 가격표를 붙였다. 덤벙이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송 아무개의 작품은 터무니 없이 비싸다는 소문만 낸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지금껏 작품을 제대로 팔아본 적이 없다.

팔려고 작품을 한 적도 없고, 파는 데 익숙하지도 않은 탓이다. 그러다 보니 작업은 물론 먹고 사는 데 지장이 많다. 하지만 장삿속으로 싸구려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조선사발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보성덤벙이를 주로 하는 이는 없습니다. 다른 그릇에 비해 손도 몇 배 더 타는 데다 돈이 안 되기 때문이죠. 다른 도자기들은 가마에서 나오는 순간 우선 예쁩니다. 첫 눈에 뻑 가죠. 그런데 덤벙이는 무덤덤한 것이 끄는 맛이 없어요. 그러니 누가 선뜻 비싼 돈을 내고 사겠어요? 덤벙이는 쓰면서 완성되는 도자기예요. 쓰는 사람의 공력에 따라 진화하죠. 기물이 약해 함부로 쓸 수도 없어요. 고수라야 볼 줄 알고 사는데 아직 우리나라에는 극소수입니다.”

하지만 송씨는 앞으로도 계속 보성덤벙이를 할 생각이다. 우리의 조그만 사발이 다른 나라에서 국보나 문화재로 위해진다는 자체가 그로 하여금 사명감을 부추기는데다 그동안 여러 번 때려치우려 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을 보면 업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글 이만훈 월간중앙 편집위원 [mhlee@joongang.co.kr]
사진 최재영 월간중앙 사진부장 [pressc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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