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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BOOK] 조선 시인 이옥봉·이언진, 그 놀라운 사유의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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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8세기에 활약한 이언진은 연암 박지원과도 견줄 만했던 천재문인이었으나 요절했다. 사진은 한 일본인이 그려줬다는 이언진 초상화. [돌베개 제공]

저항과 아만(我慢)
박희병 지음, 돌베개, 476쪽, 1만8000원

이옥봉의 몽혼 (夢魂)
하응백 엮음, 휴먼앤북스, 156쪽, 1만원

몽혼
조두진 지음, 휴먼앤북스, 292쪽, 1만원

함께 기뻐하자. 신간 세 권은 16세기 여성시인(이옥봉)과, 18세기 천재 시인 (이언진)을 각기 시집·소설·평설로 만들었는데, 알려지지 않았던 두 인물의 등장은 밋밋했던 근대 이전 문학사에 내려진 느닷없는 축복이다. 특히 저자 박희병 서울대 교수가 감히 “(연암) 박지원과 마주세울 만한”(41쪽) 이로 평가한 18세기 해체주의자 이언진은 한글세대와의 가슴 벅찬 만남이다.

우선 이옥봉은 조선 사대부에게 잘 알려진 여성. 임진왜란이 나던 해에 40년 삶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를 두고 “조선 제일”(홍만종) “여성 특유의 화장냄새가 없다”(허균)고 평가하고 있다. 양반의 소실로 살아야 했으니 불우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시세계는 정갈하니 둘 사이의 갈등이 얼마나 컸을까.『이옥봉의 몽혼』과 『몽혼』은 한 세트인데 시집·픽션(역사 전기소설)이라서 보완적으로 읽힌다. 문집 『가림세고』의 작품 32편을 근거로 부활시킨 것이다.

충격은 이언진(1740~66)이다. 책의 완성도 역시『저항과 아만』은 월척급이다. 무엇보다 다룬 인물 자체가 물건이다. ‘골목길’이라는 뜻의 호동(<885A><8855>)을 아호로 썼다는 것만 봐도 예사롭지 않은 사람인데, 논문 몇 편이 전부이던 상황에서 저자는 신뢰할만한 재해석과 함께 그를 세상에 내놨다. 호동은 역관(譯官) 출신의 요절한 천재. 유·불·선에 노장사상을 회통하며 시대와의 불화를 겪었다

“이따거의 쌍도끼를/빌려와 확 부숴 버렸으면/손에 칼을 잡고/강호의 쾌남들과 노닐었으면.”(무제·한시 원문 생략)

옛 한시에서 이런 파천황의 변칙을 보신 적이 있나? 그리고 웬 이따거? 당나라 등 고전시의 낡은 세계와 굿바이했기 때문에 백화문 ‘따거(형님)’등이 마구 등장한다. 그래서 중세의 반시(反詩)주의자인 그가 ‘수호지’의 이규 등 떼도둑과 자기를 동일시한 시 세계도 너무도 강렬하다. 말하자면 ‘조선의 프롤레타리아문학’인 셈인데, 미발표작이라서 저항의식이 이토록 시퍼렇다. 자기를 부처라고 선언하는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반면 세상의 외진 곳을 끌어안는 가슴도 더 없이 널널하다.

“과거의 부처는 나 앞의 나/미래의 부처는 나 뒤의 나/부처 하나 바로 지금 여기 있으니/호동 이씨가 바로 그.”(무제) “더러울 때는 똥물과 같고/컴컴할 때는 칠통(漆桶)과 같다./사람의 마음도 이러하거늘/내가 왜 문 앞 골목 싫다고 하겠나.”(무제)

숨이 턱턱 멎을 지경이다. 170개 시가 거의 그렇다. 세 살 위인 연암을 포함한 이덕무·다산 등 18세기 신진 사대부들이 ‘체제 안의 지식인’이라면 호동은 완벽한 아웃사이더다. 이런 시의 등장이 우연일까? 자기만의 문장론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렴! 그는 섣부른 고전세계를 반복해 희롱하는 낡은 시를 “옛사람 쥐구멍이나 찾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천재+혁명가’인 호동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물꼬를 터준『저항과 아만』의 등장에 갈채를 보낸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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