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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세상] 봄나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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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봄이다. 봄에는 온 세상에 생명의 힘이 가득 차 몸의 컨디션이 최상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이유 없이 몸이 나른하고 자꾸 졸리며 입맛도 없어져 공부나 일을 해도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겨우내 푸른 채소를 충분히 섭취하지 못한 우리 몸은 항(抗) 스트레스 호르몬인 부신피질호르몬을 만들어내는 비타민이 거의 고갈된 상태다.

게다가 기온 상승으로 체온이 올라가는 것을 막느라 피부혈관이 확장돼 혈액이 피부 쪽으로 몰리면 자연히 내장의 혈액 순환은 약해지고 소화액의 분비도 떨어져 식욕부진이 된다.

춘곤증이다. 또 봄에는 입학.취직.승진.전근 등 사회적인 변화가 많아 스트레스도 늘어난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봄은 햇살이 좋아 산과 들에 온통 파란 싹들이 움튼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 광종.문종.예종은 도살 금지령을 내리고 생선을 잡던 어구까지 모조리 불태워 없앴다.

산림이 국토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삼면이 바다인데도 동물과 생선을 먹지 못하게 했던 이런 상황이 백성을 들로 산으로 먹을 것을 찾아 나서게 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식품은 미나리.쇠비름.질경이.모싯대.쇠기나물.족두리풀.더덕 등 수십 가지다.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나물을 많이 먹는 민족이 된 것은 이때부터가 아닐는지.

요즘 우리가 먹는 채소는 산나물 96종류, 들나물 60종류, 재배채소 23종류라고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은 전한다.

종류가 많은 만큼 이름도 소박하고 재미있는 것 투성이다. 며느리밑씻개.파드득나물.소리쟁이.엘레지.쑥부쟁이.광대수염…. 먹는 방법도 다양해 쌈으로 먹는가 하면 살짝 데쳐 볶거나 초고추장이나 간장에 무치기도 한다.

곡물가루와 섞어 전을 부치거나 적으로 꿰고 튀김도 한다. 생채.김치도 물론 해먹는다.

그뿐인가. 국.찌개.전골에 넣는다.

봄에 나오는 조개나 쇠고기와 같이 조리해보라. 나물에 부족한 단백질이 보충돼 새로워진 그 깊은 맛이란! 떡으로도 만들어 겨우내 부족했던 비타민과 무기질을 보충하기도 한다.

움파.산갓.당귀싹.미나리싹.무싹 등을 베어 쌉쌀하고 매콤한 반찬(五辛盤)을 입춘 절식으로 만들어 먹었던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다.

요즘 시장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나물은 달래.취.냉이.씀바귀.돌나물.미나리.두릅.원추리 등이다.

특히 봄나물은 몸의 변화 때문인지 더욱 맛있고 신선하다.

그러나 정성을 많이 요구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나물의 독특한 향취와 맛을 잃지 않으면서 본래의 빛깔과 영양소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냉이는 뿌리와 잎을 손질하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나 채소 중에서 단백질 함량이 가장 많고 칼슘.철분.비타민 A와 C가 충분하다.

날것으로는 먹지 못해 반드시 데쳐 먹는데 지나치게 익히지 않아야 향긋한 봄 냄새를 식탁에 올릴 수 있다.

데칠 때 소금을 넣으면 변색과 비타민C의 파괴도 줄고 모양도 유지할 수 있다. 데친 후 바로 찬물에 넣는 것도 잊지 말 것.

달래는 칼슘과 비타민 C가 많고 알칼리성 식품이어서 겨우내 과다한 동물성식품 섭취로 산성화된 신체의 균형을 바로잡아 준다.

푸른 잎이 많고 알뿌리가 동글동글해야 좋은 것. 수염뿌리가 긴 것은 온상 재배해 매운 맛이 덜하다.

달래는 알뿌리의 얇은 껍질을 벗기고 수염뿌리와 잎끝을 정리해 깨끗이 씻은 후 고춧가루를 살짝 뿌린 간장 양념에 무쳐 먹으면 별미다.

매운 맛이 너무 강하면 알뿌리를 칼등으로 두들겨서 묽게 푼 식초에 담가 두었다 먹는다.

단, 오이와 같이 무칠 때는 영양소가 파괴되지 않도록 식초를 조금 넣어주는 것을 잊지 말자.

봄나물 중에 향긋한 쑥도 빼놓을 수가 없다. 쑥의 어린잎엔 철분.칼슘이 많다.

특히 비타민 A는 같은 중량의 쇠간보다 많고 비타민C는 딸기나 귤보다 많이 들어있다. 봄 감기 예방에도 효과가 좋다.

데친 쑥을 송송 썰어 다진 고기.양념을 섞어 완자를 만들어 달걀물에 적신 후 끓는 육수에 넣은 애탕(艾湯)은 귀부인처럼 우아하고, 펄펄 끓는 된장물에 콩가루를 묻혀 끓인 쑥국은 서민적인 맛이어서 식성대로 즐길 수 있다.

쌉싸름한 돌나물은 입안의 촉감과 씹는 맛이 일품. 오늘 저녁은 가족을 위해 봄나물을 만들어 보자.

손정우 <배화여자대학 전통조리과 교수>

▨ 손정우는…

1960년생으로 숙명여대.대학원을 거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 음식 문화에 관심이 많아 순대.식혜를 문헌고찰한 논문을 비롯, '한국전통음식' '한국음식대관' '최신조리원리' 등의 책도 썼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시력이 나빠지자 쇠간.당근 등 비타민 A를 강화한 식단으로 건강을 회복한 경험이 있어 식품의 위력을 절감해 식품영양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

보기에도 예쁘고 식품의 배합과 영양의 균형이 거의 완전한 비빔밥과 만두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국수는 서양식의 스파게티 종류를 좋아한다.

우리음식문화연구소와 한국조리과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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