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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혼인빙자간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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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최근 영미법의 이슈 중 하나는 ‘기만에 의한 강간(Rape by deception)’의 성립 여부다. 지난 2007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최고법원은 동생으로 가장하고 동생의 애인과 성행위를 한 남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여성이 성행위에 동의했을 경우는 강간죄를 적용할 수 없으며, 동의가 기만에 의한 것인지는 법이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계에서는 의사로 위장한 병원 직원에게 성추행을 당한 여성의 사례 등을 들어 ‘기만’도 강간의 수단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26일 한국에선 혼인빙자간음죄에 56년 만에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한국 사법행정학회가 2006년 펴낸 ‘주석 형법’ 교과서에 따르면 이 죄는 1953년 9월 대한민국 형법이 처음 제정될 때부터 존재했다. 당시 일본도 유사한 법을 제정하기 위한 초안을 갖고 있었으나 실제 반영하지는 않았다. 현재는 미국의 일부 주와 터키·쿠바·루마니아 등에 유사한 죄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법의 의미는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남성들로부터 여성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이 법 제정 2년 뒤에 일어난 박인수 사건을 볼 때 과연 그 취지가 받아들여졌는지는 의문이다. 55년 7월 미남의 전직 해군 대위가 20여 명의 여대생을 유린했다는 스캔들은 장안의 화제였고 결국 박인수는 2심에서 혼인빙자간음으로 1년형을 선고받지만, 대중은 도리어 피해자(?)인 여대생들에게 손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68년작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유부남 사업가(신영균)와 사랑에 빠진 여교사(문희)가 남자를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했다면 관객은 여주인공을 애잔한 마음으로 바라봤을까. 물론 세월이 흘러 지난해엔 남편(김주혁)을 둔 아내(손예진)가 미혼 남성과 또 한번 결혼한다는 파격 소재의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가 화제가 됐다.

이런 변화를 봐선 혼인빙자간음죄의 퇴장은 자연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 여성의 성적 결정을 존중하게 된 것일까. 지금이야말로 여성에게만 일방적인 정조를 강요하는 봉건적인 시선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를 자문해 볼 때다. 분명한 것은 ‘기만에 의한 강간’의 성립 여부를 논의하기까지엔 아직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는 것이다.

송원섭 JES 콘텐트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