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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배움과 가르침의 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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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처럼 뛰어난 성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물론 김양의 뛰어난 재능을 먼저 꼽아야 할 터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

설명의 단서는 김양이 어릴 적부터 영어를 접했다는 사실이다. 엄마의 배려 덕분에, 김양은 어릴 적에 영어 책을 많이 읽고 디즈니 만화 영화도 즐겨 보았다. 엄마와의 일상적 대화도 영어로 나눴다. 이런 경험은 분명히 좋은 영향을 미쳤을 터이다. 언어 습득 이론에 따르면, 언어는 어릴 적에 배워야 한다.

사람이 언어를 쓰는 일은 문화적 현상이다. 자연히, 언어는 문화적으로 전달된다. 반면에, 사람이 언어를 쓸 수 있게 하는 육체적 바탕은 생물적 현상이다. 그런 육체적 바탕은 물론 유전적으로 전달된다.

언어와 그것의 육체적 바탕이 그렇게 따로 전달되므로, 언어를 배워서 쓰려면, 먼저 그 두 계통을 잇는 일이 필요하다. 그 일은 타고난 언어 능력을 특정 언어에 맞춤으로써 이뤄진다.

신생아는 언어를 배울 육체적 능력을 완벽하게 갖추고 태어나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각인(imprinting)이라 불리는 이 과정은 컴퓨터의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가 탑재돼 일을 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각인은 생태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환경은 빠르게 바뀌지만, 유전자들은 천천히 바뀐다. 따라서 환경에 관한 정보들을 모두 유전자들에 담는 방식은 비효율적이다. 기본적 특질들만 유전자들에 담아 전달하고 개체가 만나는 특정 환경의 정보들은 습득하도록 하는 방식이, 즉 각인이, 훨씬 합리적이다.

각인은 특정 시기에만 이뤄진다. 그래야 각인이 적절하게 이뤄지고 한번 각인된 지식이 쉽게 바뀌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동물의 새끼들이 어미를 알아보는 일은 대표적이다.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라 불리는 이 시기는 언어 습득에선 출생부터 11세 안팎까지다.

이 시기에 배운 언어가 모국어가 되고, 두 언어를 함께 배우면, 그 둘을 잘 쓰는 이중언어사용자(bilingual)가 된다.

언어를 배우는 일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겨우 나흘밖에 되지 않은 아기들이 언어들을 구별하고 한 달 지난 아기들이 모국어에 대한 편향을 보인다.(얼마 전엔 태아들이 부모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기들의 울음소리에 이미 모국어의 운율이 반영된다는 얘기다.) 마침내 다섯 살이 되면, 어른들과 똑같은 언어 능력을 갖춘다. 김현수양의 놀라운 성적은 어릴 적에 집에서 영어를 자연스럽게 배운 것으로 상당 부분 설명될 수 있다.

이처럼 언어는 배우는 것이다. 누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국어를 어릴 적에 스스로 배워서 잘 쓴다. 한국어를 이미 잘하는 상태에서 학교에 갔지, 학교에서 가르쳐서 한국어를 깨우친 것이 아니다. 우리 영어 교육의 본질적 문제는 어린이들이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 시기가 지난 뒤에 억지로 가르치려 든다는 점이다.

언젠가 영어 공용이 이뤄져 영어가 일상적으로 쓰이기 전까지는, 우리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울 환경은 나오기 어렵다. 지금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케이블 텔레비전의 채널 서넛을 정부가 확보해서, 어린이들을 위한 영어 방송을 하는 것이다. 2세 이하, 3~4세, 5~6세로 구분해서 동요·동화·애니메이션·연극·영화를 종일 방송한다면, 큰 자원을 들이지 않고도 아쉬운 대로 그런 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안의 또 하나 장점은 점점 큰 문제가 되어가는 영어 격리(English Divide)를 누그러뜨리리라는 점이다. 어릴 적에 영어를 자연스럽게 배우지 못하고 뒤늦게 교육을 통해서 배울 때, 교육의 질은 부모의 재력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영어 능력을 통해서 가난이 세습된다. 김현수양은 학식과 경제적 여유를 지닌 부모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지금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영어를 접할 기회가 없다. 케이블 텔레비전을 통해서 어린이 영어 방송이 운영되면, 가난한 어머니들도 자식들에게 영어를 배울 기회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