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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익 '문학과지성사' 대표 명예로운 퇴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최인훈의 '광장' 에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을 거쳐 신경숙의 '딸기밭' 까지. 시인 정현종.황동규에서 황지우를 거쳐 유하까지. 평론가 4K(김현.김병익.김주연.김치수)에서 정과리를 거쳐 김동식까지. 그리고 문예지 '문학과 지성' 에서 '우리세대의 문학' 을 거쳐 '문학과 사회' 까지.

지난 30년간 '문학과지성사' 가 남긴 궤적은 뚜렷하다. 그 주역은 단연 25년간 출판사 대표직을 맡아온 김병익(62.평론가)씨다.

그가 18일 명예로운 퇴진을 한다. 대표직을 시인 채호기(43)씨에게 넘기고 그는 고문으로 물러난다.

"주위에서 절더러 복받은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정말 그래요. 30년간 하고 싶었던 일을 무사히 마쳤고…, 또 저같은 20세기형 인물이 마땅히 물러나야 할 시점에 그 짐을 맡길만한 믿음직한 후배들도 있으니까. "

홍익대앞 출판사 대표실은 어수선했다. 짐을 꾸리는 도중이라 책이 든 박스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김씨는 빙긋이 웃는 얼굴로 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1994년 대표직을 물러나기로 처음 결심한 이후 퇴임날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가벼워지더니 요즘은 웃음을 달고 다닌다고 했다. 그는 정말 행복해할만큼 여러 복을 누려왔다.

가장 큰 복은 문학과 만난 것. 문학소년이었던 그는 막상 대학에 진학하면서 "문학은 두려워서, 나 같은 사람이 해서는 안될 일처럼 느껴져" 문학을 택하지 않았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 대학 4년에 4.19를 맞았다.

"자유민주주의를 성취했다는 자부심" 을 가지고 대학을 마친 그는 "정치학 전공으로 마땅히 취직할 곳이 없어" 언론사(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외경심 때문에 피했던 문학을 기자가 돼 다시 만났다. 10년간 문학담당 기자로 70년대 문단을 좌우했던 평론가 김씨 4인방, 흔히 '4K' 라고 불리던 나머지 3명의 친구 김현.김주연.김치수씨 등 문인들을 두루 사귀었다.

70년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문예지의 창간을 제안한 것은 고 김현(90년 작고)씨였다.

계간 '문학과 지성' 이라는 이름 아래 4K가 모였고, 인권변호사였던 고 황인철(93년 작고)씨가 원고료를 부담하는 재정후원자로 나섰다. 황변호사는 김씨의 중.고.대학 동기동창. 출판은 일조각에 맡겼다.

김씨는 75년 언론자유화운동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돼자, 아예 '문학과지성사' 라는 출판사를 만들어 대표를 맡았다. 해직이 본격적인 문학활동에 뛰어드는 계기가 된 셈이다.

김씨의 두번째 복은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불가능해 보였던 당초의 5가지 금기를 지킬 수 있었다는 점. 돈을 벌 수 있는 책들인 외국소설.수필집.아동도서.참고서류를 절대 만들지 않고, 자비(自費)출판(저자가 돈을 내 만드는 책)은 사절한다는 등의 다짐은 현실적으로 "곧 망하겠다" 는 다짐과도 같았다.

그러나 김씨는 이를 지켰다. 다행히 그간 문인들과 맺은 교분 덕에 좋은 저자를 골라 베스트셀러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그는 이런 금기를 파기했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70년대식 고집은 지킬 수도 없었고, 지킬 필요도 없어졌어요. 금기를 만든 제가 이를 직접 깨버려야 제가 물러난 후에 후배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지 않겠어요. " 김현.황인철씨 등이 암으로 숨지면서 김씨가 후배들에게 출판사를 넘겨야겠다고 결심하면서 금기를 깨뜨리기 시작했다.

수필이나 아동도서를 출간하지만 그래도 순수문학이라는 격조는 지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복은 개인적인 것이다.

아흔을 넘겨 해로하고 계신 부모로부터 건강한 체질을 물려받아 최근까지 하루 두 갑씩 담배를 피우고, 진한 커피를 연거푸 마시면서도 일일이 교정을 봐왔다.

출판사가 들어있는 7층 건물도 '빚 지지 말라' 며 부모가 물려준 재산이다.

지난 30년간의 세월 속에서 그에 대한 비판도 없진 않았다. '보수적' '권위적' '엘리트주의' 는 비판의 골자다.

"순수한 고급문화를 지키고 가꾼다는 원칙에 충실하다 보면 여러 가지 비판을 받게 마련이고, 또 비판들은 모두 근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학문에 학파가 있듯 문학에도 유파(流派)가 있어야한다는 점은 인정해주었으면 하죠. "

김씨는 이제 딸 셋을 출가시키고, 외아들마저 곧 유학을 떠나게 돼 널찍해진 집의 2층을 서재로 바꾸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 곳에서 그는 지난 세월을 정리하는 뭔가를 해볼 생각이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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