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총 초점 사외이사] 문제점과 개선방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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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화학관련 상장기업의 사외이사인 L씨는 최근 이사회에 참석했다가 무안만 당했다.

회사측이 주가 관리를 위해 자사주 매입.기업 설명회 개최 등을 추진하겠다는 안건을 상정한데 대해 "실효성이 없다" 고 반대했는데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돈으로 부채를 갚고 투자하는 게 장기적으로 주가를 올리는 방법이라고 주장했으나 상근 이사들이 "지금 주가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도 모르고 한가한 이야기를 한다" 고 묵살했다는 것이다.

전자업체인 A사의 사외이사인 P씨는 이사회 때마다 당일에야 관련 자료를 주는 회사에 불만이 많다. 그는 "상정된 안건에 대해 사외이사들이 충분한 검토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자료를 일부러 늦게 주는 것 같다" 고 말했다.

상장기업은 1998년부터 사외이사를 두도록 의무화됐다. 그 뒤 전체 이사 중 사외이사 비율이 점차 높아지는 등 외견상으로는 사외이사 제도가 정착되는 추세다.

그러나 속내는 회사측이 여전히 사외이사 활용에 형식적이며 사외이사들도 이사회 참석에 소극적 자세를 보이는 등 겉도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업들은 사외이사의 직무수행에 불만을 털어놓고 있다. B그룹 관계자는 "e-비즈니스 환경으로 급변하면서 사외이사로부터 전문적인 자문을 구하고 싶지만 실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고 말했다.

C기업은 이번 주총에서 사외이사를 앞당겨 절반 이상 뽑기로 한 가운데서도 내심 고민하고 있다.

구조조정.신규사업 진출 등 처리할 안건이 예년보다 많은데 사외이사들이 어떤 태도를 보일 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

회사 관계자는 "기존 사외이사들이 책임 부담이 큰 구조조정이나 대규모 투자.신규사업 진출 등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여 애먹었다" 며 "앞으로 사외이사가 절반 이상으로 늘어나면 부결되는 안건이 속출할 것 같다" 고 말했다.

기업들은 이밖에도 ▶사외이사의 참여도 및 성의 부족▶경비 부담▶경영에 대한 이해부족▶기업 비밀 유출 가능성 등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사외이사들은 근본적으로 회사측이 사외이사를 제대로 활용하려는 의지가 없다고 지적한다.

특히 일부 기업은 보안 유지를 이유로 회사의 중요사항을 사외이사에게 알려주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사외이사들은 자료 부족으로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되는 '악순환' 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기아자동차 사외이사인 최열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은 "이사회에 참여할 때 회의 전 건네주는 자료를 근거로 얘기할 수 밖에 없다" 며 "사외이사들이 적극적으로 현장에도 가보고 기업에 도움이 되는 제안을 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아쉽다" 고 말했다.

전경련 조사에 따르면 이사회에서 사외이사들이 안건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참석하는 경우가 88%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SK텔레콤 등 일부 기업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사외이사에게 회사의 비밀자료 등을 사전에 모두 제공해 이해를 구한 뒤 유출되지 않도록 즉시 폐기하는 내용의 서약을 받는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사외이사들은 또 '상근 이사들의 오너 눈치보기' 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건설업체의 사외이사인 B씨는 "지난해말 열린 이사회에서 정보통신 분야로의 신규 사업 진출에 반대했으나 기각당했다" 며 "업종이 전혀 다른 사업을 벌이는 게 위험부담이 커 참석했던 사외이사들이 대부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이사의 뜻에 따라 원안대로 통과됐다" 고 말했다.

이병욱 전경련 기업경영팀장은 "선진국 같이 기업이 자율적으로 사외이사를 선임하기 보다 법과 제도로 강제하는게 문제" 라고 지적했다.

LG경제연구원 이원흠 상무는 "사외이사의 적극적인 경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스톡옵션 제공 등 인센티브를 주고 사외이사가 많은 기업에 대해선 다양한 지원이 필요하다" 고 지적했다.

◇ 사외이사란〓대주주들이 이사회를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만 구성해 독단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외부인을 이사회에 참여토록 한 제도. 외환위기 직후인 98년 기업 구조조정 추진 과제의 하나로 도입됐다.

첫해인 98년에는 모든 상장법인(법정관리기업 등은 제외)이 1명 이상의 사외이사를 선임하고 이를 어기면 상장 폐지까지 할 수 있도록 했다.

자산규모 2조원이 넘는 상장기업이나 금융기관은 올 주총 이후엔 전체 이사의 3분의 1 이상을 사외이사로 구성하고, 내년부터는 그 비율을 50% 이상으로 높이도록 의무화했다. 또 한사람이 여러 회사에 중복 선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특정인의 사외이사 겸임이 두 곳으로 제한된다.

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현재 거래소 상장사 가운데 관리대상종목 등을 제외한 6백47개사가 1천2백51명의 사외이사를 두고 있다. 이 중 1백2명은 2곳, 23명은 3곳을 맡고 있다. 외국인은 전체의 2.4%인 27명이다.

연령별로는 50대.60대가 73.2%로 가장 많고, 직업은 기업인.교수.변호사등의 순이다.

임기는 3년이 대부분(76.3%)이나 2년(18.4%), 1년(5.4%)인 곳도 있다.

이사회는 평균 1년에 4차례 정도 열리며 사외이사들은 보통 월급 또는 이사회 참가비 명목으로 매달 1백만~3백만원 정도를 받는다.

김시래.송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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