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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만원짜리 가사(袈裟)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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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얼마 전 모르는 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부산에 산다는 그 스님은 “한국 불교가 이대로는 안 된다”며 이런저런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중 하나가 “출가자가 300만원짜리 가사도 입는다. 말이 되느냐”였다. 얼핏 보면 가사는 승복 위에 걸치는 천에 불과하다. 그런데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조계종단에서 정한 ‘표준 가사’의 가격은 20만~40만원이다. 그러나 일부 스님이 개인적으로 구입하는 가사는 수백만원을 훌쩍 넘어간다.

사실 2500년 전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일부 비구가 조각을 기운 것이 아닌, 통으로 된 상아색 가사를 입었던 거다. 그걸 본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장자(부자) 같다”며 출가자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 얘기를 들은 붓다는 “잘라진 조각을 기워라. 이것이 수행자에게 어울리는 가사다”고 말했다. 붓다의 수제자인 가섭은 평생 하나의 가사만 가지고 산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반박하는 이도 있다. “가족도 없고, 집도 없는 스님들이 수백만원짜리 가사 한 벌 입었다고 그리 대수인가?” “신자들의 공양으로 그런 가사를 걸쳤을 거다. 그건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입느냐, 입지 않느냐’가 아니다. 전화를 걸었던 스님은 ‘출가자의 청빈’이라는 가사의 본질적 의미를 뼛속 깊이 새기며 살고 있는가를 따졌던 거다.

이처럼 ‘종교’의 일거수일투족에는 본질적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타성에 젖는 순간,그 본질을 놓치게 된다. 신자뿐만 아니다. 성직자도 그렇다. 불교뿐만 아니다. 기독교도 그렇다. 개신교에 선십일조를 한다. 십일조의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뭔가. “나는 왜 십일조를 하는가?” 스스로 그걸 물어야 한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다”고 했다. 십일조는 그런 ‘영적인 가난’을 일구기 위한 구체적인 방편이다. 물질적 가짐을 떼어내며정신적 가짐도 떼어내는 거다.그래서 십일조 후에는 ‘내가 영적으로 더욱 가난해졌는가’를 꼭 따져 봐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나의 의무를 다했으니 하늘의 보상을 받겠지”라며 뿌듯함에만 머문다면 ‘영적인 비만’에 걸리게 마련이다.

가톨릭도 마찬가지다. 성당에서 접하는 복잡한 전례가 과연 내게 형식과 의무로 다가오는가, 아니면 전례의 본질적 의미들이 꿈틀대는 생명으로 다가오는가. 꼭 따져 봐야 한다. 그건 내가 ‘산 미사’를 보는가, 아니면 ‘죽은 미사’를 보는가의 차이다. 종교가 나의 습관이 되고, 우리의 관습이 될 때 물음표는 사라진다. 그 물음표 속에 ‘진리를가리키는 나침반’이 숨겨져 있는데도 말이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