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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갤러리 '한국과 서구의 전후 추상미술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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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추상미술을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뭘 말하려는지 아리송하기 때문이다.

사과면 사과, 꽃이면 꽃, 그림 속에 뭔가 모양이라도 있으면 나으련만 도무지 '무엇' 인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추상미술을 이해하는 열쇠는 어디 있을까. 18일부터 서울 순화동 호암갤러리에서 열리는 '한국과 서구의 전후 추상미술 : 격정과 표현' 전은 '무엇' 을 그렸는 지보다 '왜' 그렸는가를 알고 보면 한결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전시다. 제목에 나와 있는 '격정과 표현' 을 힌트로 활용하도록 한다.

전쟁은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든다. 1백% 파괴다. 그러나 추상미술의 역사에서 보면 전쟁은 파괴인 동시에 창조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전쟁의 참상과 인간성의 말살을 경험한 유럽 예술가들은 기존의 회화를 깡그리 부정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다. 바로 앵포르멜(informel)이다.

앵포르멜은 '형태가 없다' 는 뜻이다. 잭슨 폴록의 드리핑(dripping:물감을 흩뿌리는 기법)회화를 시발로 한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는 여기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국전쟁 후 우리 화가들 역시 앵포르멜에 강하게 매료됐다.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 창립을 계기로 터질 듯한 울분과 불만, 예술가로서의 들끓는 격정은 지극히 추상화한 형태로 표출돼 캔버스에 자리잡게 된다. 앵포르멜에는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것이다.

기획자 우혜수 큐레이터는 "60년대 들어 미국에서 팝 아트나 옵 아트가 유행했지만 유독 앵포르멜이 수입된 것은 그만큼 우리 화가들의 감성과 맞아떨어졌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10년의 시차가 있지만 비슷한 탄생 배경을 가진 서구와 한국의 전후 추상미술을 비교.감상하는 맛이 색다를 것" 이라는 설명이다.

출품작은 모두 70점. 외국 작가들의 작품은 대부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다. 유럽 앵포르멜 1세대인 볼스.장 뒤비페.장 포트리에의 작품이 나들이했다.

볼스의 '니렌도르프' (일본 가와무라 미술관 소장), 장 뒤비페의 '아버지의 충고' , 장 포트리에의 '인질' 시리즈 중 '현명한 해리' 등이 소개된다.

추상표현주의 작가로는 잭슨 폴록.윌렘 데 쿠닝.마크 로스코 등이 대표적.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빌려온 잭슨 폴록의 '넘버 18' , '일본 가와무라 미술관 소장품인 볼스의 '니렌도르프' , '클리포드 스틸의 가로 4m.세로 3m 대작 '무제 1956-H' , 데 쿠닝의 '무제 ⅩⅥ' 이 전시된다.

이밖에 조르주 마티유.로버트 마더웰.안토니 타피에스 등 쟁쟁한 화가들을 만나볼 수 있다.

국내에선 박서보.하종현.윤명로.김창열.권옥연.송영수.이세득.이응노.정창섭.최욱경 등이 등장한다.

이름을 들으면 짐작할 수 있듯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모더니즘의 계보는 사실상 앵포르멜 운동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박서보의 '회화 No.1' 은 형상이 완전히 사라진 화면을 보여줌으로써 앵포르멜 시대의 막을 연 화제작이다.

'No.7' 까지 모두 7점을 그렸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이것 뿐이다.

이번 전시는 그림뿐 아니라 자료 발굴에도 신경을 썼다. 윤명로가 쓴 "침체되고 부패한 현존의 모든 질서를 부정한다" 는 내용의 육필선언문, 현대미술가협회.60년미술가협회의 전시 팸플릿, 사진 자료 등이 한국 현대미술사의 가장 큰 사건으로 기록된 이 앵포르멜 운동이 싹틀 무렵의 정황을 증언해 준다.

'…격정과 표현' 전은 삼성미술관(관장 홍라희)과 중앙일보 공동주최로 5월14일까지 계속된다.

개막 당일 오후 2시에는 심포지엄이 열린다.

월요일 휴관. 02-771-2381.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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