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6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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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60.총대 맨 한전사장

박정기(朴正基.65.국제육상연맹 집행이사)한국전력 사장은 "저를 좀 믿어달라" 며 "韓박사님께서 경수로(輕水爐)핵연료 국산화 사업을 추진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 고 거듭 다짐했다.

나는 그가 하도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하길래 '일단 이 분을 믿어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는 내 표정이 다소 밝아지자 "며칠후 이사회를 소집할테니 다른 사람을 보내지 말고 韓박사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이사들에게 사업 설명을 해 달라" 고 요구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노라" 고 대답했다.

며칠후 한전 이사회가 열렸다.1983년 7월 중순이었다. 대략 7~8명의 이사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선창(金善昶.73.현대건설 고문)한전 부사장이 보이지 않았다. 金부사장은 내가 구상한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계획안이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해서인지 계획안에 분명히 반대한 인물이었다.

나는 계획안을 만들 때 이번 기회에 경수로 핵연료 생산기술을 완전히 익혀 기술자립을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金부사장은 기술자립은 우리나라 여건상 시기상조라고 판단해 핵심 기술인 핵연료 설계와 기술도입에 대한 평가 등은 전적으로 외국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인간적으로는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지만 이처럼 핵연료 생산문제에 관해서만은 나와 의견을 달리했다. 어쨌든 그가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朴사장은 이사회가 시작되자마자 "오늘은 특별히 韓박사님께서 참석하셔서 그런지 회의장 분위기가 밝다" 며 "회의도 순조롭게 풀릴 것 같다" 고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사들은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 계획안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이들이 가장 문제를 삼은 것은 핵연료 설계 인력이었다.

내가 "핵연료 설계 기술을 자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백50명의 설계 인력이 필요하다" 고 말하자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설계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데 너무 무모하지 않느냐" 며 이의를 제기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경수로 핵연료를 설계할 수 있는 인력은 고작 3~4명 밖에 안됐다. 그러니 이들이 그같은 우려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또 이들은 '원자력의 원조' 라고 불리우는 미 웨스팅하우스社가 '경수로 핵연료를 설계하는 데 40명의 인력이면 충분하다' 고 자문한 것을 내세워 나를 공격했다. 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미 웨스팅하우스사는 1천명 이상의 핵연료 설계 인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우리더러는 40명이면 충분하다고 얘기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얘기입니다. 이는 우리를 기술적으로 영원히 예속시키려는 속셈입니다.

우리보다 기술이 앞선 선진국들이 왜 수백명씩 설계 인력을 보유하고 있겠습니까. " 그러나 이사들은 내 말에 선뜻 공감하지 않는 눈치였다. 우리 손으로 그 어려운 핵연료를 설계한다는 게 아무래도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실제로 핵연료 설계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했다.

당시 핵연료 설계를 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소련.프랑스.독일 등 10개국도 채 안됐다. 이사들이 그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朴사장이 나섰다. 나를 변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사들에게 "韓박사께서 경수로 핵연료를 국산화하겠다는데 그렇게 비판만 하지 말고 한번 적극 도와주자" 고 설득한 후 "반대하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 모두 박수를 치자" 며 먼저 힘차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이사들도 마지 못해 따라서 박수를 쳤다. 나는 그가 고마웠다. 朴사장은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에 강한 집착을 갖고 있던 전두환(全斗煥.69)대통령의 심중을 읽고 '총대' 를 맨 게 틀림없었다.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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