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에게 毒을 먹이고도 수사망 빠져나간 궁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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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호 32면

경종의 초상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출생 당시부터 서인(노론)의 격렬한 반감을 사다가 36세에 급서해 독살당했다는 설이 무성했다. 초상화에 먹물이 스며든 것은 독살설을 암시한다. 경종의 초상은 전해지는 게 없어 이복동생인 영조의 초상화와 장희빈의 외모에 관한 각종 기록을 참조해 그린 것이다. 우승우(한국화가)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⑥ 세 가지 의혹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목호룡 고변 사건’ 수사 과정에서 독약으로 독살하려는 소급수(小急手)가 실제 시도되었다는 자백이 나와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김창집의 친족 김성절(金盛節)이 세 차례의 형문(刑問:고문하며 묻는 것) 끝에, “장씨(張姓) 역관(譯官)이 (중국에서) 독약을 사가지고 왔는데, 김씨 성의 궁인(宮人)이 성궁(聖躬:임금)에게 시험해 썼습니다…(『경종실록』 2년 8월 26일)”라고 자백한 것이다. 이때도 역시 환관 장세상이 등장한다. 김성절은 “장세상이 수라간(水刺間)의 차지(次知: 담당자) 김 상궁(金尙宮)과 동모(同謀)했는데, 김 상궁이 많은 은화를 요구하고는 한 차례 성궁(聖躬)에게 시험해 썼으나 곧바로 토해 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성절은 “이기지(이이명의 아들)의 무리가 ‘약(藥)이 맹독이 아니니, 마땅히 다시 은화를 모아 다른 약을 사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경종실록』 2년 8월 26일)”라고 덧붙였다. 중국에서 독약을 사다가 시험해 보았으나 경종이 죽지 않자 더 강한 약을 사오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경종이 독약을 마셨다는 날짜를 『약방일기(藥房日記)』에서 찾아 보니 경종 즉위년(1720) 12월 15일 ‘어제 거의 한 되나 되는 황수(黃水)를 토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영의정 조태구와 함께 입시한 약방제조(提調) 한배하(韓配夏)가 “그날 수라를 진어(進御)하신 뒤에 즉시 구토하셨습니까?”라고 묻자 경종은 “그렇다”라고 답했다. 그날의 구토가 독약이 든 음식이 든 결과였음이 확인된 셈이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을 독살하려 한 노론의 정치행위는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당시 노론 당인(黨人)들은 국왕보다 노론이 위에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은 우홍채(禹洪采)에게 “노론은 천지와 더불어 무궁한 길이 있다(老論有與天地無窮之道)”라고 말했는데 국왕은 유한해도 노론은 영원하다는 이런 자신감이 비정상적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한 원동력인지도 몰랐다.

이상한 것은 경종의 태도였다. 당초 국청(鞫廳)에서 독약을 올렸다는 김성(金姓:김씨 성) 나인의 조사를 요청하자 당연히 허용했다가 돌연 “김성 궁인을 조사했으나 그런 인물이 없었다”면서 수사를 중지시킨 것이다. 국청에서 계속 사사를 요청하자 “나인을 조사해 밝히는 것(査出)은 원래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노론(老論)을 타도하는 계책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으니 앞으로 이런 문자는 써서 들이지 말라(『경종실록』 2년 8월 18일)”고 거부했다. 독살 기도 사건이 노론 타도 계책으로 확대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경종실록』의 사관은 “인정(人情)이 독약을 쓴 궁녀를 찾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겼는데, 뜻밖의 비답이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의혹해 했으나 그 단서를 알지 못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숙종 43년(정유년) 북경에 갔다 온 역관 중에 장씨 성의 역관이 없자 국청에서 김성절을 다시 추궁했는데 그는 진짜 범인(元犯人)은 ‘역관 홍순택(洪舜澤)’이라고 지목했다. 지난해 이이명의 집에 갔을 때 이희지와 역관 홍순택이 뒷방에서 나누는 밀어(密語)를 들었다는 것이다.

“홍순택이 이희지에게 ‘약값이 부족해서 내가 자비(自費)로 많이 보탰다고 말하자, 이희지가 ‘일이 성사되면 그대가 자비로 낸 돈을 어찌 보상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했습니다. 제가 창문을 열고 들어가 앉으니 이희지는 즉시 말을 중지했는데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습니다.(『경종실록』 2년 8월 26일)”

김창집의 서종형제(庶從兄弟) 김창도(金昌道)의 사돈 이정식(李正植)도 “김창도가 약을 쓸 곳을 말했는데 곧 상궁(上躬:임금)을 가리켰습니다”라고 자백했고, 김창도는 “홍성(洪姓) 역관에게 약을 사서 장세상에게 들여보냈다”고 시인했다. 또한 왕세제의 처사촌 서덕수가 모두 이 흉모에 동참했다고 자백했다. 역관 홍순택은 부인했으나 그가 북경에 갈 때 데려갔던 종 업봉(業奉)은 ‘북경에서 계란만 한 황흑색(黃黑色)의 환약(丸藥) 두 덩이를 구입했다’고 자백했다. 이처럼 구체적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경종은 김성(金姓) 나인에 대한 수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삼사(三司)에서 해를 거듭 넘기면서까지 계속 요구했으나 경종은 거부했다.

그러던 경종 4년(1724) 4월 인원왕후 김씨가 이 사건을 거론하고 나섰다. 숙명공주(淑明公主)의 아들 심정보(沈廷輔)의 아내 이씨에게, “김성 궁인이 진실로 의심스럽다면 주상께서 어찌 불허하겠는가? 나 역시 어찌 분명히 조사하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궁중에 실지로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찾지 못하는 것이다(『경종실록』 4년 4월 24일)”라고 말했다. 이는 경종의 수사 중지 지시가 대비의 압력 때문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삼사는 계속 수사를 요청하고 경종은 거부하는 사이 경종은 약방(藥房:내의원)의 입진(入診)을 받게 되었다. 경종 4년 8월 초부터 한열(寒熱)에 시달렸고, 설사 기운이 동반되었다. 한열 때문에 수라를 거의 들지 못하는 가운데 시령탕(柴<82D3>湯), 육군자탕(六君子湯) 등 여러 처방이 올려졌으나 환후가 허하고 피로가 중첩되었다.

그러던 8월 20일 문제의 사건이 발생한다. 그날 밤 경종은 가슴과 배가 조이는 듯 아파서 의관을 불러 입진했다. 그런데 그날 밤의 흉통(胸痛)과 복통(腹痛)이 그날 낮에 있었던 의문의 사건 때문임이 드러났다.

“여러 의원들이 어제 게장(蟹醬)을 진어하고 곧이어 생감(生<67FF>)을 진어한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리는 것이라 하여 두시탕(豆<8C49>湯) 및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진어하도록 청했다.(『경종실록』 4년 8월 21일)”

의가에서 금기로 치는 게장과 생감을 와병 중인 임금에게 진어했다는 것이다. 훗날 영조 31년(1755)의 나주벽서 사건 때 신치운(申致雲)이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경종 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따지자 영조가 분통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게장과 생감을 보낸 인물이 대비 인원왕후이고 이를 진어한 인물이 세제(영조)라는 주장이었다. 경종이 게장 덕분에 평소보다 많은 식사를 했는데 다시 생감을 올리려고 하자 어의들이 서로 상극이라며 반대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올렸다는 것이다.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어의들은 게장과 생감이 원인이라며 두시탕(豆<8C49>湯)과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처방했으나 복통과 설사는 더욱 심해졌고 22일에는 황금탕(黃芩湯)을 올렸으나 역시 효과가 없었다. 24일에도 세제는 처방을 두고 어의 이공윤(李公胤)과 다투었다. 『경종실록』은 이공윤에 대해 “그의 의술은 대체로 준리(峻利:강한 처방)를 위주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다. 8월 24일 세제가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라”고 명하자 이공윤이 “내가 진어한 약을 복용하신 후 삼다(蔘茶)를 진어하면 기를 운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라고 반대했다. ‘기를 운행하지 못한다’는 말은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세제가 이공윤을 꾸짖었다.

“사람이 본래 자기 견해를 세울 곳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 어떤 때인데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려고 삼제(參劑)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인가.(『경종실록』 4년 8월 24일)”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제는 인삼과 부자를 올렸고 경종은 눈동자가 조금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지는 등 증상이 개선되는 듯하다가 다시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그날 새벽 3시쯤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하고 말았다. 재위 4년2개월, 만 36세의 한창 나이였다. 대비가 옹호한 김성 궁인의 독약 사건, 대비전에서 올렸다는 게장과 생감, 어의와 다투어가며 올린 인삼과 부자, 이 세 사건은 모두 경종의 죽음과 일련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대비와 연잉군이 경종을 살리기 위해 게장·생감·인삼·부자를 올렸는지, 아니면 죽이려고 올렸는지는 그들만이 알겠지만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어한 것은 의혹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경종이 사망한 후 약방도제조 이광좌는 “신이 어리석고 혼미하며 증세와 환후에 어두워서 약물을 쓰는 데 합당함을 잃은 것이 많았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울며 자책했다.

그러나 세제의 태도는 달랐다. “병환을 시중드는데 무상(無狀)하여 이 지경에 달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기도는 비록 때가 지났으나 속히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국왕이 위독하면 산천에 기도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때까지 기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위독한 상태가 아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갑자기 증세가 악화되어 산천에 기도할 틈도 없이 사망한 것이었다. 이렇게 경종의 시대가 끝나고 영조의 시대가 열렸지만 경종 시대의 유산이 계속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경종 끝. 다음 주부터는 ‘절반의 성공’ 영조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