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남북 정상회담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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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남북정상회담은 열리는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김정일(金正日)을 계속 치켜세우는 것을 보면 물밑에서 뭔가 일이 추진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청와대는 즉각 부인했지만 남북한.중국의 3각 정상회담이 열린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정상회담의 방식에는 두가지가 있다. 출구론과 입구론이다.

출구론에 따르면 두나라 최고지도자가 만나기 전에 실무급 협상이 선행해 합의가 이뤄지고 정상(頂上)들은 이미 성사된 합의를 확인하는 의식을 위해 만난다. 정상회담은 다분히 상징적인 행사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 실무수준의 협상이 진전을 보지 못해 정상들이 큰 타협으로 개념적인 돌파구를 찾아내는 방식이 입구론이다. 베트남 평화협상 때 헨리 키신저와 북베트남의 레둑토가 파리에서 여러 차례의 협상을 통해 평화안에 합의한 것은 출구론의 방식이기도 하고 입구론의 방식이기도 하다.

남북정상회담은 북한이 미국하고만 대화를 하고 남한과의 당국자간 대화를 기피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의 전략을 고집하고 있는' 결과 남북문제의 교착상태가 타개되기 위해서는 정상들의 담판이 필요하다는 현실로 정당화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최고위급의 담판은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가 구체적이고 개별적일 때 유효한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의 경우는 논의대상이 '방대하고 '복잡하다.

대결을 풀고 평화공존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합의는 일반적이어서 구속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남북문제의 성격상 정상회담이 입구론 방식이라 해도 상당수준의 준비가 필요한 건 말할 것도 없다.

햇볕정책 2년동안 남북간에는 물밑접촉과 협상이 상당히 진행돼 왔고, 따라서 金대통령이 아무런 준비 없이 집념 하나만 갖고 김정일을 만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도 북한의 행태로 보아 충분한 협의가 진행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은 남는다.

입구론 방식의 정상회담은 성과가 확실히 보장되지 않는데 비해 위험부담이 큰 것이 단점이다. 정상회담이 실질적 성과없이 끝나면 상당기간 실무급의 협상까지 추진력을 잃어 정상회담이 없었던 것만 못한 경우가 많다.

남북정상회담이 서울이나 평양에서 열릴 가능성 보다 제3국에서 열릴 가능성이 큰 것이라면 베이징에서 장쩌민(江澤民)의 주선으로 열린다는 보도가 허구로만 생각되지는 않는다.

베이징의 3각 정상회담을 가정하면 세가지의 큰 문제가 떠오른다.

김정일이 1995년 이래의 중국의 희망대로 중국을 방문하면 의전상의 최고예우 말고도 실질적인 반대급부를 기대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당연히 그 일부를 한국더러 부담하라고 할 것이다. 거간꾼의 구전(口錢)이다. 부담의 정도와 회담의 성과에 따라 그것은 金대통령에게 정치적인 부담이 될 수 있다.

김정일의 중국방문에 관한 북.중간의 논의는 지난해 6월 김영남(金永南)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베이징 방문 때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정일 중국방문의 조건에 관한 협상은 아직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남북정상회담의 성사 자체가 김정일의 중국방문에 관한 북.중협상에 달렸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은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미국의 경계도 문제다. 미국은 한반도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누구에게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다.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중국의 주선으로 중국에서 열리는 것을 미국이 환영할 리 없다.

金대통령의 일련의 발언들을 보면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그의 의지가 강해 보인다. 3각회담이라도 남북수뇌가 만난다면 그것 자체로도 남북관계에 큰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상회담의 의미가 커도 미국과 일본의 반발을 부르고, 정상회담을 돈으로 성사시켰다는 의혹은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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