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우린 원래 훌륭한 어린이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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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농·산·어촌을 다녀보면, 우리 사회의 담론 유통구조가 무언가 크게 잘못돼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교육 문제만 해도 그렇다. 외국어고 논란으로 나라가 시끄럽지만, 정작 유아기의 ‘기회 불평등’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서울 아이들은 책이 넘쳐나는데 시골에서는 책을 대할 기회조차 드물다. ‘책읽는사회만들기 국민운동’을 펴고 있는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김선영 간사는 “읍·면 이하 지역 아이들 중에 유난히 읽기 부진아가 많다. 초등학교 2~3학년인데도 글을 잘 읽지 못한다”고 걱정한다. 세종시 논란에 퍼부어지는 온갖 담론과 주장의 100분의 1만이라도 유아·어린이의 교육기회 평등 문제로 돌린다면 나라의 장래는 훨씬 밝아지리라고 생각한다.

지난달 하순 찾아간 곳은 폐광지역인 삼척시 도계읍이었다. 부천의 만화작가 모임 ‘복사골만화인마을’이 도계지역아동센터에서 벌인 ‘신나는 만화놀이터’ 행사를 구경하러 갔다. 장래 희망 직업대로 캐리커처 그려주기, 페이스 페인팅, 동화 구연…. 아이들은 무척 즐거워했다. 그런데 한 남자아이가 구석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다가가서 왜 함께 놀지 않느냐고 묻자 주최 측이 간식거리로 사 온 과자 박스를 가리키며 “저거 나 먼저 먹으면 안 돼요?”라고 물었다. 점심을 굶었다고 했다. 이미 태어나 커가는 아이를 굶기는 주제에 우리 사회가 저출산의 심각성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마저 들었다. 이곳 아동센터 아이들의 90%는 조손(祖孫)·한 부모 가족이다.

나는 농·산·어촌 지역 가족 형태의 대세로 자리 잡은 조손·다문화·한 부모 가정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다각도로,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동화책과 동요들은 이제 ‘주류 가족 형태’를 전제로 하는 관행을 탈피해야 한다.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아기 곰…’ 하는 동요를 기억하시는가. 엄마·아빠 곰이 없는 가정의 아이는 이 동요가 즐거울까. 곰 아닌 ‘사슴 나라 출신 엄마’ ‘토끼 나라 출신 아빠’를 가진 아이가 소외감을 느끼지는 않을지 생각해 보았는가. 문승연 작가는 아이가 엄마·아빠의 손을 잡고 기뻐하는 TV 광고를 예로 들면서 “폭력적인 장면”이라고 탄식했다. 동화작가 노경실씨도 “아직도 우리나라 아이들은 서양에 비해 나와 다른 모습이나 삶에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동화책에서도 다양한 모습의 삶을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 전형적인 가정, 전형적인 행복이란 것은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결혼 이주한 외국인 엄마, 할아버지·할머니만 있는 집도 가정의 자연스러운 한 형태로 묘사하는 책·노래가 많이 나와 널리 읽혀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고 협력하며 다문화 사회를 이끄는 균형 잡힌 어른으로 자란다. 그게 진정한 국제화이자 대한민국의 경쟁력이다. 도계지역아동센터의 실내 벽에는 ‘우리는 원래 훌륭한 어린이입니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 그렇다. ‘원래 훌륭한’ 어린이를 어른들이 잘못해서 훌륭하지 못하게 키우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