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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래? 한국이 IT 강국이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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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IT 강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산업 경쟁력은 갈수록 하락하고, 새로운 성장엔진은 작동할 기미가 없다. IT제조업은 비대해졌는데, 정작 고부가가치 분야인 서비스와 소프트웨어 시장은 허약하기 짝이 없다. 이러다가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 통째로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위기에 빠진 한국 IT산업은 새로운 르네상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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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IT산업은 트로트 시장 같다.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 트로트는 가요계를 평정했다. 주현미·현철·태진아·송대관 등 대형 스타가 가요대상을 휩쓸었다.

“추진 동력 떨어지고 신성장엔진은 멈칫
제조업과 서비스 불균형 성장 속 ‘비전 상실’”
IT코리아 길을 잃다

전성시대였다. 이후 트로트 시장은 침체의 길을 걸었다. 장윤정·박현빈 같은 신세대 스타가 명맥을 잇고 있지만 과부족이다. IT업계가 그렇다. 90년대 후반 벤처 붐은 숱한 스타 CEO를 배출했다.

그들은 ‘신화’였다. 젊고 똑똑하고 야망을 가진 벤처 사장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IT 코리아’를 일으켰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들의 뒤를 잇는 대형 신인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유능하고 패기 있는 청년들은 더 이상 테헤란 밸리를 동경하지 않는다. 시장은 신명을 잃었다.

기어이 사람들은 ‘우리가 과연 IT 강국인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세계 1위의 통신 인프라가 깔리고, 초고속 인터넷과 휴대전화 가입자가 가장 빨리 포화상태까지 이르고, 세계 선두를 지키는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착시를 일으켰다. 돌아보니 반쪽짜리 IT 강국이었다.

IT산업 경쟁력 갈수록 하락

우선 한국 IT산업의 현실부터 보자. 최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한국 IT산업 경쟁력이 2007년 3위에서 작년에는 8위, 올해는 16위로 떨어졌다고 발표했다. 세계경제포럼(WEF) 조사에서는 지난해 9위에서 올해 11위로 하락했다.

글로벌 IT업체인 노키아지멘스네트웍스가 세계적 컨설팅회사인 LECG와 런던 비즈니스 스쿨에 의뢰해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정보통신기술(ICT)이 경제 발전과 생산성에 기여하는 정도를 측정한 조사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선진국 25개국 중 18위에 그쳤다. 지난 10월 말 일본 총무성은 선진국 IT인프라 조사에서 일본이 한국을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고 발표했다.

이게 현실인데 사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계속해서 경고가 있어왔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이석채 KT 회장은 한 강연에서 “국내 IT산업은 새로운 성장엔진이 없어서 정체 현상을 겪고 있다”며 “더 이상 IT 강국이 아니다”고 일갈했다. 황창규 삼성전자 상담역은 지난 9월 서울대 특강에서 “IT산업의 성장률이 계속 하향세에 있다”고 경고했다.

정부도 이런 분위기를 잘 안다. 지난 9월 ‘IT 코리아 5대 미래전략’이 발표됐던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보고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영원한 힘, IT’라는 현수막을 보고는 “IT가 요즘 기가 죽었다고들 해서 이런 제목을 정한 것 같다”고 말했다. 행사에 참석했던 한 국책연구원 관계자는 “오랜만에 IT산업에 대한 종합 전략이 발표되는 자리였는데 분위기는 한마디로 맥이 풀려 있었다”고 했다.

IT는 여전히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다. IT산업은 GDP의 24%를 차지하고, 수출의 3분의 1을 담당한다. 지난해 우리나라가 130억 달러의 무역 적자를 기록했을 때 IT분야는 600억 달러 흑자를 봤다. 지난 10월 IT 무역수지는 64억 달러 흑자였다.

대표 IT기업들도 흔들

하지만 속내는 들여다보면 문제가 심각하다. 우선 불균형 성장이 문제로 지적된다.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은 ‘불균형적인 IT산업, IT 서비스업 육성하자’라는 보고서에서 한국은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45%, 휴대전화와 LCD는 각각 23%와 46%를 차지하지만 IT 서비스 분야는 1%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IT제조업은 훌쩍 컸지만 서비스 분야 경쟁력은 형편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통계로 잡는 IT 수출 품목 중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전화가 수출액의 7할을 차지한다. 그나마 1%의 사업체가 생산의 70%, 수출의 85%를 차지하는 구조다. 더군다나 주요 장비와 핵심 부품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휴대전화의 경우 무선고주파집적회로(RFIC), 통신용 프로세서, 무선통신칩, 위성항법장치(GPS) 칩의 국산제품 채용률은 0%다. 그나마 3개 품목 외에 IT제조업 경쟁력은 자신할 수 없다. 국내에서 매출 1조원을 넘는 IT장비 업체는 단 한 곳도 없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국내 IT장비 산업의 기술경쟁력은 선진국의 55~90%, 가격 경쟁력은 후발국 대비 70~95%다.

앞은 쫓지 못하고, 뒤에서는 쫓기는 형국이다. IT서비스는 국내 매출액 대비 수출 비중이 지난해 1.3%에 불과하다. 그나마 무역수지는 매년 적자다. 국내 최대 IT서비스 업체가 2조원 정도 매출을 올리는데, 이 중 해외에서 벌어들인 것은 600억원 정도다. 대기업 3사가 시장 전체의 60%를 차지하고, 영세 업체들은 협소한 국내시장에서 과당경쟁을 벌인다.

세계시장으로 나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2007년 한국의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 점유율은 1.7%다. 고질적인 소프트웨어 산업 부진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역대 정부마다 소프트웨어 산업 진흥을 약속했지만 공염불이었다.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은 반도체보다 4배, 휴대전화보다 6배 크다.

고용창출 효과도 조선산업의 두 배(10억원당 16명)에 달한다. 하지만 국내 최대의 소프트웨어 업체 매출은 딱 한 번 1000억원을 넘었을 만큼 전반적으로 영세하다. 이동통신 분야는 포화상태에서 새로운 성장엔진을 찾지 못해 고심 중이다.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했던 와이브로(휴대인터넷)는 좀처럼 시장이 열리지 않는다.

사업자로 선정된 KT와 SK텔레콤의 와이브로 서비스 누적매출은 6월 말 현재 140억원이다. 그동안 투자한 금액의 1%가 안 된다. 가입자는 37만 명이다. 정부는 이맘때쯤 300만 명 가입을 예상했었다. 또한 황금알이 될 것이라던 무선인터넷 시장도 휴대전화 가입자 100명 중 13명만 활용한다.

특히 각 이동통신 회사가 포화상태인 국내시장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의욕적으로 진출했던 해외사업 역시 줄줄이 철수하고 있다. 국내 IT업계 대표주자들의 최근 상황만 봐도 IT산업 사정은 녹록지 않다. 국내 최대의 소프트웨어 기업인 티맥스소프트. 이 회사는 요즘 구조조정설에 시달리고 있다.

관련 업계에는 “500명이 권고사직 통보를 받았다”는 소문이 돈다. 회사 측은 “전체 정원의 10% 정도”라고 했다. 그래도 200명 선이다. 이 회사는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로는 처음으로 지난해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대표 주자다. 하지만 올 상반기에는 매출 370억원에, 220억원의 영업 손실을 봤다.

올 초부터 매각설과 유동성 악화설이 돌았고, 국내시장 점유율 98%에 달하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에 대적할 토종 운영체제(OS) 발표는 계속 지연되면서 위기설이 커지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무리한 공격 경영이 화근이었지만 척박한 국내 소프트웨어 시장 환경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했다.

SK텔레콤은 최근 중국 2대 통신업체인 차이나유니콤 지분을 전량 매각했다. “최종 목표는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라며 전략적으로 진출했던 카드를 접은 것이다. SKT는 지난해에도 4000억원 이상 투자한 미국 가상이동망서비스(MVNO) ‘힐리오’ 사업을 3년 만에 철수했다.

이 회사는 2003년 서비스를 시작한 베트남의 ‘S폰’ 사업에도 투자를 중단한 상태다. KT 역시 “말레이시아 최대 이통사로 키우겠다”며 진출한 U모바일사업을 1년 만에 포기했다. 국내시장이 포화된 상태에서 해외 진출을 신성장엔진으로 삼겠다던 국내 이동통신사들이 해외에서 잇따라 고배를 마시고 있다.

IT업계 “총체적 난국”

포스데이타는 지난 7월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삼았던 와이브로 사업을 전격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시장 활성화 지연과 글로벌 경쟁 역량 부족에 따른 수익성 악화”가 회사 측이 밝힌 이유다. 이 회사는 지난해에만 와이브로 개발비로 450억원의 손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와이브로 개발에 착수한 후 1700억원을 투자했지만 누적 매출은 30억원이었다. 와이브로는 정부가 차세대 먹을거리로 육성하겠다던 핵심 전략사업 중 하나였다. 업계에서는 “와이브로에 기대를 거는 것은 이제 정부와 보조금을 타먹으려는 영세업체뿐”이라는 냉소가 흐른다.

이명박 정부 들어 업계에선 ‘IT 홀대론’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토목사업과 녹색성장에 밀려 뒷전이 됐다는 푸념이다. 정보통신부가 해체되고, IT관련 예산이 줄었다는 게 불만의 배경이다. 정부 정책 역시 실천 전략은 없고 생색내기만 한다는 비판을 한다. 지난 9월 정부가 TI산업에 향후 5년간 189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중 정부 투자액은 14조원이다. 시장이 흉흉하다 보니 기대와 질책이 정부에만 쏠리는 분위기다. 한국 IT산업이 총체적인 난국에 빠진 것에 대해 이견은 없다. “길을 잃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길은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로로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IT코리아는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 당장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먹고살 길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더 이상 방치하면 한국 경제에 희망이 없다.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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