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역로비 시대의 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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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세상이 바뀌었다. 위세를 부리던 의원님들이 낙천명단 때문에 시민단체에 줄을 대려고 혈안이 됐고, 여당 중진의원은 시민단체를 찾아가 단식농성을 한다.

본래 시민단체라는 것이 정부나 국회의 정책이나 입법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다시 말하면 그 공공기관을 상대로 로비를 위해 결성된 것인데 이제는 거꾸로 공공권한을 위임받은 의원들이 누구로부터도 권한 위임을 받지 않은 시민단체를 찾아가 로비를 하는 세상이 됐다.

음모냐, 공익이냐 하는 논쟁을 떠나서 시민단체들(NGOs)은 이미 우리나라에서 현실적인 힘, 또하나의 권력이 되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미국 시애틀에서 열렸던 세계무역기구(WTO)대회가 국제 NGO들의 격렬한 반대시위가 하나의 요인이 되어 실패로 끝났다. 지뢰금지조약도 수백개의 NGO들의 운동으로 체결됐다.

이러니 취약한 기관일수록 NGO 눈치보기에 급급하다. 1994년 월드뱅크를 상대로 NGO들이 '50년 해먹은 것으로 족하다' 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월드뱅크 해체운동을 벌였다.

이후 월드뱅크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NGO와의 대화다. 지난해 월드뱅크 사업의 절반 이상에 NGO가 참여했다. 또 70명 이상의 NGO 출신 전문가들이 현지 사무소에 채용되었다.

미국 정치과정의 핵심 중 하나는 압력단체의 역할이다. 이들이 행정부와 의회에 각자의 이해에 따라 로비를 벌이고 이러한 다원적인 목소리가 종합돼 입법이나 정책결정이 이뤄진다.

과거 시각으로 보면 로비라는 것은 당연히 시민단체가 정부나 의회를 상대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의 역할이 커지면서 이와는 거꾸로 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행정부나 의회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압력단체를 동원, 이용하는 것이다. 즉 역(逆)로비 현상이 나오는 것이다.

미 클린턴 대통령은 92년 선거에서 공약한 '경찰 10만명 증원' 프로그램을 공화당 의원들이 예산을 이유로 반대하자 60만명의 경찰관련 종사자들과 수십개의 관련 시민단체를 동원해 의회에 법안통과토록 압력을 행사했다 해서 시비가 일었다.

거꾸로 의회가 행정부에 압력을 넣기 위해 시민단체를 동원한 적도 있다. 공화당은 94년 선거에서 기업에 대한 정부규제를 풀겠다는 공약을 실현시키기 위해 3백50여개의 시민단체를 동원했다. 시민단체의 힘이 커졌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들이다.

미국만 해도 소위 2백만개의 NGO들이 공익 또는 특정분야의 이해를 내세우며 활동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수만개의 머리를 가진 벌레' 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단체들이 멋대로 행동한다 하면 가공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NGO를 규제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 언론결사의 자유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위법은 용서치 않는다. "우리는 공익을 위한 단체니까 법을 초월한다" 는 식의 얘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정부가 시민단체를 자기 목적에 이용할 수 없도록 벽을 철저히 쳐 놓는다. 반(反)로비법(Anti-Lobbying Act)은 시민단체의 로비행위에 정부가 지원할 수 없도록 되어 있으며, 정부 인사가 의회에 압력을 넣기 위해 풀뿌리 로비를 동원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특히 행정부가 자기 목적을 위해 시민단체에 재정을 지원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다.

명백한 법위반 사항이 아니더라도 시민단체의 윤리와 관련된 문제가 자주 제기되고 있다. 공익을 빙자해 특정단체의 입노릇을 해주는 문제, 공익을 내세워 기금을 모금해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행위, 기금만 내면 무슨 일이든 대신 해주는 청부 총잡이 행위(gun for hire)등등 분류도 가지가지다.

이러니 시민단체의 투명성과 책임성에 대한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다. 시민단체도 언론.의사.변호사 등과 같이 직업에 따른 자율적인 규율이 마련돼야 하고 이 집단에 대한 견제와 균형, 그리고 자율적인 감시도 따라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문창극<미주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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