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민여망 외면한 선거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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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여곡절 끝에 16대 총선 게임의 룰이 정해졌다. 1년2개월여를 끌어오다 8일 밤 국회를 가까스로 통과한 선거법을 비롯한 정치관계법은 그러나 많은 손질이 불가피한 얼치기에 불과하다.

국회의원 정수를 26석 줄이고 비례대표 후보의 30% 이상을 여성에 할당토록 한 선거법이나 정당법 개정안 등의 일부 내용은 진전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허점과 불합리.반개혁 투성이라는 사실을 부인키 어렵다. 촉박한 시일과 국민적 질타에 쫓기면서 당리당략과 여론을 꿰맞추는 수준에 불과했다. 이렇다 보니 당장 시행될 선거법에 대한 시비와 이로 인한 혼란 등이 우려된다.

한나라당은 즉각 선거구 획정이 헌법재판소 결정에 배치되는 것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하겠다고 나섰다.

의원정수를 10% 가까이 감축한 것은 평가할 만하지만 위헌시비 소지가 뻔한데도 그대로 넘긴 것은 정치 편의주의를 넘어 무책임한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표의 등가성 확보는 특정 정파의 이해득실 이전의 원칙적 문제다.

이번 총선에 큰 파문을 몰고온 시민단체에 대한 규제해제도 미봉에 그침으로써 오히려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소지가 크다.

국회는 단체의 선거개입을 금지하고 있는 선거법 제87조 및 사전 선거운동을 규정한 제58, 254조를 고쳐 선거운동기간 전 낙천명단 발표 등을 허용했다.

또 선거운동기간 중 단체명의로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반대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막상 지지.반대를 위한 집회, 가두 캠페인, 서명작업, 피켓동원 운동을 금지시켰다.

전화.컴퓨터통신 이외의 방법을 통한 낙천.낙선.당선활동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에 총선시민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장외집회를 통한 낙선운동 강행 등 시민 불복종운동을 공언하고 있어 사태는 계속 꼬이고 있다.

유세장 아닌 별도의 집회.서명허용 등 규제 일변도의 법을 대폭 완화하는 적극적 대응책을 외면함으로써 건전한 시민단체마저 불법화하는 우(愚)를 범했다.

시민단체는 불복종운동과 함께 선거법 재개정 운동을 병행할 기세다. 여기에 국민적 여망이 컸던 개혁적 내용들이 상당부분 빠진 점도 국민적 기대를 외면한 처사다.

특히 고비용.저효율 타파를 위한 방안의 하나로 꼽혔던 지구당 폐지가 없었던 일이 된 것은 정치권 자정(自淨)의 한계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다.

허점 투성이의 게임 룰로 이번 총선을 치를 경우 선거법 자체를 우습게 여기는 풍조가 만연하지나 않을지 그게 큰 걱정이다.

이번 두차례 선거법 협상과정을 볼 때 선거구획정이나 선거 및 정치 관련법 개정은 새 국회가 열리는 초기에 시작해 이번처럼 어정쩡한 정당간 야합의 산물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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