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담론] 5. 'NGO의 기수' 박원순 변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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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이제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니다.지구촌 곳곳에서 개인의 권리를 지키려는 시민사회단체(NGO)들이 권력에 맞서 강력한 견제세력으로 떠오르고 있으며,국내 NGO들도 권력과 거대자본의 전횡을 막는‘제3의 힘’으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그러나 일부 엘리트에 의존하는‘시민 없는 시민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투명성을 확보해야 하는 등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는 많다.

이홍균 이화여대 교수(42·사회학)가 그 해법과 NGO의 새로운 방향성을 알아보러 한국‘NGO의 기수’박원순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를 만났다.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이교수는 독일 마부룩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97년 ‘한국시민운동의 현주소’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만난사람= 이홍균 이대교수]

- 'NGO 르네상스' 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로 시민단체의 활동이 활발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힘과 스피드죠.

"우리 NGO의 상황을 보면 '르네상스' 라는 말이 적당치 않다고 봐요. 르네상스라면 활발했던 한 시대가 부흥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우리 경우에는 그야말로 처음 맞이하는 실험이자 현상이니까요. 민주화 운동을 통한 고난과 희생의 과정을 거친 우리 사회가 이제 비로소 NGO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

- 지난 세계무역기구(WTO)대회에서도 NGO의 막강한 힘이 증명됐잖아요.

"그렇습니다. NGO는 새로운 정보교류 수단인 인터넷을 만나면서 엄청난 힘을 갖게 됐습니다.

순식간에 수 만, 수 십만 명이 정보를 공유하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결집할 수 있는 것은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

- 그래도 한국에는 여전히 NGO와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랜 봉건 시대-식민 시대-분단과 독재의 시대를 거치면서 사회공동체 참여가 개인에겐 불이익만 초래한다는 인식이 뇌리에 박혀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아주 빠른 속도로 달라지고 있어요. "

-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NGO운동에 불이 붙고 있는데 그만큼 국민주권에 대한 열망이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역사를 제도적인 면에서 보면 직접 민주주의에서 대의 민주주의로 흘러왔습니다. 다변화된 사회에서 불가피하게 차선책으로 대의 민주주의를 선택했지요. 수년전 미국의회에서 인턴으로 4개월간 근무하면서 '인사청문회 제도' 를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대통령이 고위관리를 지명하면 상원에서 인준하는 일종의 국가기관간 역할분담이지만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간접적으로 인사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는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시민단체가 나름대로 의견이나 정보를 제공하면서 간접적으로 인사에 참여하는 형태, 그것이 바로 NGO를 통한 국민주권 행사죠. "

- 대의 민주주의에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전제 하에 NGO가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를 보완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대의 민주주의는 그것대로 발전돼야 하지만 우리도 서양처럼 그'합니다. 모든 것을 개인이나 시민단체들이 해낼 수는 없으니까요. 서양처럼 우리도 대의 민주주의의 틀 아래서 참여 민주주의'것을 보장하는 많은 제도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형식으로는 민주주의를 이루었지만 내용에서는 대통령이나 일부 관료에 의존하는 현실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감사원 인력만 해도 겨우 8백 여명에 지나지 않아요. 이 정도 인력으로 3백60조원이 넘는 돈과 1만 명 이상의 감사대상을 어떻게 제대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미국에는 '폴스 클레임 액터(False Claim Act.예산부정주장법)' 란 게 있습니다. 개인이 예산의 부정한 사용이나 낭비 사실을 발견하면 법원에 환수청구소송을 낼 수 있게 한 법률이죠. 이 법률 하나로 국민 개개인이 모두 감사관이 되는 셈입니다."

- 지난 국감때 시민단체들이 의원 평가를 하겠다고 나서 의원들의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죠. 대의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행위로 볼 수 없습니까.

"의회가 권한을 행사하는 과정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의회 뿐 아니라 모든 국정 과정은 유리어항처럼 투명해야 합니다."

- 말씀하신 투명성과 책임성은 시민단체에도 당연히 적용돼야 하겠죠. 시민들이 일부 시민단체의 공공성과 순수성을 의심하며 곱지않은 눈길을 보내는 것도 사실 아닙니까.

"대중이 NGO 참여자들에 대해 '혹시 명망을 얻은 다음 정치로 나서지나 않을까' '모금은 제대로 쓰일까' 등 의구심을 가지는 게 당연합니다. 많은 사람이 NGO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면서도 참여를 유보하고 있는 것은 일부 시민단체가 충분히 투명성을 보여주지 못한 탓입니다. "

- 대중의 입장에서는 NGO 참여가 당장 무슨 도움이 되나, 후대에 가서야 도움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공권력에 의한 피해나 불이익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시민은 아마 없을 겁니다.

우리는 아직 NGO 운동이 개인의 이익이나 권리와 직접 관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지 못할 따름이죠. 공공의 선(善)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정도가 서양과 한국은 차이가 있어요. 미국에는 매년 수십 조원에 달하는 기부 관행이 있습니다.

공익적인 관심사지만 결국 자신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가능한 금액이죠. 한국에서도 얼마전 시민단체가 휴대전화의 연간 전파사용료로 1만2천원을 부과한 근거가 무엇인 지 따지는 바람에 결국 이를 폐지하지 않았습니까. "

- 시민단체들의 투명성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요.

"시민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개중에는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옳고 그름을 골라내는 자정(自淨)능력이 있기 때문에 저는 NGO의 미래를 낙관합니다.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공정하게 잘 해나가고 있는지 상호 감시하고 견제해야 합니다. 물론 NGO 자신의 노력이 먼저입니다. "

- 산업사회 등장 이후 국가와 시장이 힘겨루기를 하며 사회를 이끌어 왔죠. 그 틈새에서 NGO는 어느 정도 발전한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 어느 정도 발전한 '단계입니까.

"NGO는 종래의 두 축(軸)인 국가와 시장의 역할을 보완하는 명실상부한 제 3섹터로 성장했습니다. 쉽게 말해 의회에서 국정을 견제하는 역할은 야당이 맡고 있지만 야당의원 역시 정치인.특권계층.고급관료 출신이라는 한계가 있으므로 NGO가 보완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

- NGO 운동의 국제연대에 대한 전망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민주화 운동 때 다른 나라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지금 인도네시아나 미얀마 등 우리보다 어려운 처지의 국가들에게는 제대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그동안 언어나 인식 등 기본적인 역량의 한계 때문에 국제연대에 소극적이었지만 앞으로는 인터넷이 발달해 NGO의 국제간 연대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습니다."

- NGO의 앞으로 과제는 무엇일까요.

"국가나 시장과는 다른 시민사회적 관점에서 의제 설정을 해야합니다. 아직 우리 NGO는 연대의 틀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지만 이제 곧 사회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문제를 제기하러 모든 시민단체가 모일 겁니다. "

- 변호사 일을 중단하고 시민운동에 막 투신했을 때 한 인터뷰에서 '왜 직접 정치를 하지 않느냐' 는 기자의 물음에 '정치보다 정치 감시가 더 중요하기 때문' 이라고 대답한 것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 길을 걸어갈 생각입니까.

"영원히 이 길로 가라는 말씀 같군요(웃음). 사람들은 내가 변호사를 그만뒀다고들 말하는데 나는 시민운동을 변호사가 지니는 법률적 관점과 치밀함으로 이끌어가고 있어요. 공권력을 도덕적이고 투명하며 책임 있는 것으로 만들도록 힘쓸 생각입니다. 저는 '시장 바닥에 나선 변호사' 입니다."

- 새 천년을 '참여의 세기' 라고 정의하고 싶군요. 지금까지는 방관과 굴종의 시대, 개인을 억누르는 권위주의가 날 뛰던 시대였지만 이제 타율과 방관을 넘어 참여의 길로 나아가야겠죠. 장시간 감사합니다.

"아직 잠자고 있는 대중들이 많지만 NGO가 도덕성과 책임성을 확고히 보여준다면 참여의 물결은 밀려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고맙습니다. "

정리〓김국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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