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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올림픽 숨은 주역 '국가대표 영양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 조성숙(44) 영양실장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요람 태릉 선수촌을 7일 찾았다. 올림픽이 끝난 뒤 한참 지나서인지 한산하다. 선수들은 대부분 휴식을 취하거나 소속 실업팀에 복귀해 훈련중이다. 그러나 '밥심'주러 이들을 따라 아테네에 다녀온 조성숙(44) 영양실장은 여느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내고 있다.

선수들 만큼이나 그에게도 올림픽은 '전쟁'이었다.

"아테네에서 저와 두 명의 조리사가 싼 도시락이 공식적으론 1200개, 실제로는 1500개쯤 될거에요"

'전쟁'은 지난 8월 6일부터 시작됐다. 아테네 선수촌 부근에 마련한 아파트에 여장을 풀고 근처 까르푸 등에서 재료를 준비했다. 9일부터 귀국하는 29일까지 쉴새없이 도시락을 쌌다.

도시락에는 두 공기 분량의 밥, 무장아찌.깻잎.오징어채 등 밑반찬 3종, 김치나 김치볶음, 불고기.돈육고추장볶음.장조림 중 하나, 계란말이나 조림, 김. 팀에서 요청하면 미역국, 김치찌게, 콩나물국 등 국물을 담았다.

선수들은 보통 선수촌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해 조실장은 팀의 요청이 있을 때 특별식이나 도시락을 준비했다.

국내에서 공수해간 재료만도 김치 300kg, 장아찌 150kg을 포함한 밑반찬류, 쌀 140kg 등이다. 그리스 현지 쌀이 다르다고 해 미리 준비해 간 쌀을 섞어 밥을 지었다.

이것저것 요리하다보니 전력소모가 심해 아파트의 전기가 자주 나갔다. 결국 에어콘과 전등은 거의 안 켜다시피하고 살았다. 그래도 전기를 아끼려고 음식을 한번에 여러가지 조리하지 못했다.

최절정기는 양궁 등 주요경기가 몰렸던 18~20일. 양궁팀만의 주문이 새벽 6시까지 120여개의 도시락을 배달해 달라는 거였다. 저녁에 장보고, 밤 열두시부터 세 시간쯤 눈 붙인 뒤 도시락을 만든 나날이 이어졌다.

"선생님이 해주신 밥 잘 먹어서 금메달 땄나봐요. 고맙습니다" 양궁의 박성현 선수 등 많은 이들이 이렇게 경기 후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만나면 "선생님 밥 한 번만 더해줬으면 제가 금메달 땄을 걸 은메달 땄어요"라고 농담을 건네는 선수들도 있었다.

"귀엽지. 그렇게 그렇게 하다보니 벌써 20년이네요."

조 실장이 선수촌에 온 것은 LA올림픽이 끝난 84년 11월. 연세대 식품영양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연구조교로 근무하던 중이었다. 스포츠 영양에 관한 석사논문을 준비하면서 태릉 선수촌을 드나든 것도 인연이 됐다. 초, 중학교 때는 운동하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다. "충청도 촌에서 여자애 운동시켜 뭐혀"라는 어머니 반대로 운동선수가 되진 않았지만.

20년 동안 선수촌의 영양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처음 왔을 땐 '일단 잘 먹여야 한다'는 방침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잘 먹이는 건가'를 고민하는 분위기. 굶으면서 체중감량을 하더라도 최소한 어떤 걸 먹어줘야 하는지 등에 대한 과학적 고민이 당연해졌을만큼 달라졌다.

선수들이 가장 안쓰러울 때는 체중조절 때문에 잘 먹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 대부분의 체급 종목 선수가 그렇고 여자 체조 선수들이 더하다고. 이들은 다른 종목 선수들이 한 끼에 보통 2~3인분을 뚝딱 해치우는 걸 보면서 과일 한 쪽만 먹고 버티기도 해야 한다. 그나마 나아진 건 예전엔 경기를 앞두고 단기간에 적게는 8kg에서 많게는 10여kg까지를 급격히 감량해야 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는 것. 감량으로 무리를 주지 않고 평상시의 체중 유지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체급 종목에서 체중은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좌우하기 때문에 선수들은 필사적이라고. "의지들이 대단하구나 싶기도 하지만 무리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하죠"

이번 올림픽 때도 유도 등 체급 종목은 경기 몇 시간 전에 체중을 쟀다. 이를 앞두고 밥을 굶기 때문에 시합 직전의 선수들은 탈진상태다. 이들이 쉽게 먹고 소화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조 실장은 전복죽을 끓여 보냈다. 사골국물에 밥을 말아 먹게 하기도 했다.

해외 경기가 잦은 축구 대표팀은 별도의 조리사를 두고 있지만 그리스전을 마친 뒤 조 실장은 원기 회복을 바라는 마음에 김치찌개와 불고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아네테 올림픽 조직위원회 측은 갑작스럽게 "테러가 우려돼 선수들을 선수촌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며 이를 막았다.

선수들 식성은 어떠냐는 질문에 "이원희 선수는 식사 까다로운 것도 없고, 특별히 요구하는 것도 없고 해서 아줌마들이 다 좋아해요", "장미란 선수는요, 명란젓을 좋아해요. 병에 담아놓았다가 따로 챙겨주면 방에 가서도 먹는다고 해요. 체중을 유지해야 하니까"라고 답했다.

아테네에서 선수들이 가장 찾았던 음식은 김치찌개. "한국사람은 한국음식을 먹어야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 거겠죠. 얼큰한 김치찌개를 먹고나면 속이 편안해진다고들 해요"

태릉서 배식때마다 선수들이 먹는 것을 지켜본 게 20년이다. 별도로 영양상담을 오지 않는 한 선수들과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다. 조실장은 그들이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들 지내는지 이 시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번 아테네행 음식 꾸러미에도 이런 애정을 꼭꼭 담아갔다. 하키팀이 가장 좋아하는 미숫가루, 역도팀이 좋아하는 젓갈, 여자선수들을 위한 잡채 등. 선수촌측에서는 "무슨 거창한 잡채냐. 짐되는 건 다 빼라"고 했지만, 조 실장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여자 핸드볼팀에게 잡채를 만들어주자 너무들 좋아했다고.

"그런 보람으로 밤새 도시락 싸는 거죠. 안 그러면 어떻게 배겨내겠어요"라며 조 실장은 웃었다.

"일본에는 선수촌에 영양사가 6~7명이나 있다는데 우린 둘 뿐이에요. 일본처럼 평소 훈련할 때, 시합할 때 등 경우에 따라 영양 처방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국가대표 영양사'의 바램이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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