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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앞에 길 잃은 법원 …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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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 서초동 대법원의 대법정 입구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오른손엔 형평성을 상징하는 저울을, 왼손엔 법전을 들었다. [연합뉴스]

11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는 하루 종일 착잡한 분위기였다. 서울남부지법 마은혁 판사 파문 때문이었다. 마 판사는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에게 공소기각 판결을 내리기 6일 전 민노당 의원을 지낸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의 후원 모임에 참석해 후원금을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불가리아와 그리스 대법원을 방문하기 위해 출국한 이용훈 대법원장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고 한다. 대법원 측은 “이 대법원장은 보고를 받은 뒤 ‘사실관계를 상세히 파악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한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장도 국내에 안 계시는 상황이어서 더 곤혹스럽다”고 했다.

지난해 ‘촛불 집회’ 재판 이후 거듭돼온 이념 논란이 또다시 불거진 것이다. 판사들의 이념적·정치적 성향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원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치권이나 사회단체들이 쟁점 사안을 법원으로 들고 오는 사례가 늘다 보니 재판도 정치적으로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사회 갈등을 조정하고 해법을 만들어내야 할 법원이 그 책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치적·이념적 사건을 균형감 있게 다룰 수 있는 재판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국대 김상겸(법학) 교수는 “판사의 독립성과 신분보장이 강조되는 데 반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정치적 중립성을 담보할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우리 소송법이 외국에 비해 판사의 재량권을 너무 넓게 인정하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법원 내에서는 1990년대 이후 임용된 판사들의 경우 이전 세대보다 진보성향이 강하다는 분석도 있다. 대법원은 김영삼 정부 첫해인 1993년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이 있는 사법시험 합격자도 판사로 임용하기 시작했다. 서울중앙지법의 부장판사는 “2000명이 넘는 판사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과거보다 다양해졌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판사의 ‘소신 판결’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면, 지금은 소신을 넘어선 ‘일탈적’ 판결을 염려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했다. 자칫 국민에게 불안감을 줄 수 있는 ‘튀는 판결’이 속출하면서 ‘최후의 갈등 조정자인 법원이 갈등을 더 키우는 것 아니냐’는 고민도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반면 정치적 중립성에 관한 체계적 교육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서울지역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관여’ 문제가 제기된 이후에는 후배 판사들의 재판 진행에 관해 조언을 하는 것도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했다.


진보성향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에 관한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시민단체인 자유주의진보연합은 지난 8월 “연구회 법관들이 재판을 맡으면 누구 손을 들어줄지 우려된다”며 해체를 촉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법관윤리강령은 선언적 규정에 그쳐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2007년 공직자윤리위원회의 권고사항 역시 ‘판사가 정치인 후원금을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에 머물렀다.

그 결과, 재판에 대한 불신은 점점 커지고 있다. 법관이 불공정한 재판을 할 우려가 있을 때 내는 법관 기피신청은 2006년 262건에서 2007년 234건, 2008년 300건, 2009년 8월 현재 220건으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건국대 홍완식(법학) 교수는 “법률에 따라 재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법관이 선발되도록 임용 요건이 강화돼야 하고 잘못된 판결이 내려지면 그에 합당한 평정을 매길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마 판사 문제는 이날 한나라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도 다뤄졌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이번 판결은 법조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말이 안 되는 판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많은 국민들은 마 판사가 소속돼 있는 우리법연구회가 사법의 정치화를 가져오는 것 아닌지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석천·선승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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