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여야총재들은 뭘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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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여야 총재들의 하는 짓이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선거법이 개악(改惡)됐다고 언론이 들고 일어서고, 시민단체가 아우성을 치고, 국민이 분노하자 갑자기 여야 지도부들은 자기네들은 이제껏 전혀 몰랐던 양 갑자기 전면 재협상을 지시하는가 하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선다.

물론 잘못을 뒤늦게 알고 고친다면 안 고치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너무 속보이는 짓이고 정치지도자로서 정도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바로 여야 총재 자신들이 정치개혁 입법을 하기로 합의했던 당사자들이었고 지난 토요일 통과시킬 뻔했던 선거법 개정안을 일일이 보고받았던 최종 책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金大中) 국민회의 총재와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는 1998년 11월 총재회담에서 '고비용(高費用) 저효율(低效率)의 정치구조를 저비용 고효율의 정치구조로 개선하기 위해 국회 정치구조개혁입법특위를 통해 관계법을 개정키로 합의' 했었고 다음해 3월 이를 재확인까지 했었다. 의원정수 감축.정당구조 개선 등이 주대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갑자기 뒤집어졌다. 李총재는 최근 국회의원 정수를 줄이는 것이 정치개혁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논리를 들고나와 의원정수 감축에 공공연히 반대했다.

당내의 복잡한 계보사정 때문에 여유가 없어 그런 소리를 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 자신도 정치개혁을 소리 높여 주창하던 당사자가 아니었던가.

청와대가 보인 태도는 더 가관이다. 金대통령은 국민회의 총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선거법 개정과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대변인을 시켜 유감을 표명하면서 거부권 검토 운운하다가 나중에는 시민단체가 요구하는 선거법 제87조의 폐지 등 전면개정을 긴급 지시했다는 것이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가 하는 일을 '김대중 대통령' 이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모순된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렇다면 시민단체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지시한 것은 대통령인가, 총재인가.

참으로 헷갈린다. 여론이 침묵하고 있으면 자기들 편한 대로 법을 고쳤다가 여론이 들고일어나면 금방 입장을 바꾸는 '표변' 정치지도자들에게 국민이 어떻게 신뢰를 보낼 수 있겠는가.

지금 선거가 코앞에 다가와 있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하니 모두 급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국민을 속이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야 지도자들이 총재회담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못한 데 대해 국민에게 정중한 사과부터 먼저 하는 게 순서라고 본다.

선거법 협상은 이미 1년 수개월에 걸쳐 논의할 것은 다 논의했고 검토할 것은 다 검토했다. 양당 지도자들이 결심하면 시간이 걸릴 것도 없다. 우리는 여야 두 총재가 정치개혁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길 촉구한다.

선거법은 당략에 좌우되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최소한 개악은 안 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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