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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그들만의 선거법' 누가 지키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여야가 진통 끝에 내놓은 정치개혁 관련법 합의안을 보면 도대체 유권자의 인내력을 어디까지 시험할 작정인지, 정치권에 양식(良識)이라는 게 있기조차 한지 의심할 지경이다.

특히 선거법 개정안은 '개혁' 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기도 낯뜨거운 개악(改惡)조항들로 가득 차 있다.

국회가 이러는 한 국민의 대의기관을 자임하면서 낙선운동 같은 시민 불복종 운동을 나무랄 자격을 누리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보기에 여야의 합의내용은 현역 의원들의 낯두꺼운 집단이기주의의 소산이다.

제몫 챙기기.밀실 담합.나눠먹기.바꿔치기.국민세금 탐내기는 물론, 현행 법규 위반이나 당선 후 법망(法網)피하기 장치까지 정말 골고루 망라한 야합의 결산 장부같다.

명분이고 체면이고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대표적인 것이 인구 상.하한선 원칙을 어겨가며 지역구를 지금보다 5곳이나 늘려놓은 행태다.

여야는 밀실 담합을 통해 자기들 텃밭 위주로 선거구 주고받기에 열중했고, 그 결과 정치권 구조조정이라든가 지역감정 해소같은 대의명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행 법규를 무시한 채 지난해 9월치 인구 기준을 적용한 개악은 법의 효력성을 의심케 한다.

유리한 것을 챙기고 불리한 것은 외면한 조항들에 많은 유권자가 힐난을 넘어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선거공영제 확대를 명분으로 국민 부담을 가중시킨 것만으로도 모자라 올해 여야 3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50%나 인상해 지금보다 1백45억원이 더 배정되도록 해놓았다.

한편 선관위의 불법선거운동 단속권한은 쥐꼬리만큼 늘려 생색낸 대신 선거사범 공소시효를 4개월로 대폭 단축했으니 집단이기주의라는 말을 들어 싸다.

선거공영제를 국민 세금 퍼갈 수 있는 면죄부 정도로 인식하고 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온다.

지자체장은 해당 지역 총선 1백80일 전에 공직을 사퇴해야 하는 반면 국회의원은 단체장선거 입후보 전에 사퇴할 수 있게 한 불평등 조항이라든가, 비례대표 의석 배정의 기준이 되는 의석.득표율 하한선을 현행대로 5석.5%로 과도하게 책정해 군소정당이 싹틀 여지를 없앤 것도 '그들만의 선거법' 이라는 비판을 듣기에 충분하다.

전반적인 기류가 이러하니 1인2표제나 후보 2중등록제.석패율(惜敗率)제 같이 최초로 도입한 제도들도 취지와 달리 지역감정을 오히려 증폭시키거나 신진들의 국회 진출을 막는 역작용만 돋보일 소지가 많아 보여 걱정이다.

정치권이 이번 합의안을 강행할 경우 시민단체는 물론 일반 유권자의 광범위한 반발과 불신을 살 게 뻔하다.

시민단체의 선거운동을 봉쇄하는 선거법 87조는 손도 대지 않고 자신들의 몫만 챙긴 선거법이 과연 국민적 설득을 얻을 수 있겠는가.

정치불신이 폭발하면 급기야 정치권 공멸(共滅)이 초래될 수도 있음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국회는 오늘.내일 중이라도 비판여론을 수렴해 개악 조항들을 바로잡기를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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