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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화자료 증거 인정' 단일안 실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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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 건물 앞 조형물에 반사된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모습. [연합]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위)는 5일 평검사들의 집단 반발이 일고 있는 가운데 형사소송법 개정 초안을 마련, 9일로 예정된 차관급 실무위원회에 상정하기로 했다.

사개추위는 이날 핵심 쟁점인 영상 녹화자료의 증거 능력에 대해선 단일안 마련에 실패했다.

대신 영상 녹화물의 증거 능력 인정 여부를 놓고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증거 능력 불인정 ▶최종 수단으로서만 제한적으로 증거 인정 ▶원칙적으로 증거 인정 등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또 피고인 신문제와 관련, 법정에서 증인의 진술 등 증거 조사가 끝난 뒤 실시하도록 했다. 수사 관련자의 법정 증언 범위는 검사 이외에 검찰 수사관.사법 경찰관까지 확대했다.

한편 법무부는 이날 차관급 실무위원회에 형소법 개정 초안의 상정을 연기해 달라고 사개추위 측에 요청했다. 그러나 사개추위는 일정상 연기는 곤란하다고 밝혔다.

*** 평검사들 요구 뭔가

평검사들이 사개추위에 요구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형사 사법제도 개혁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 절차를 거치고, 수사권 약화에 따른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사부의 한 검사는 "공판중심주의가 도입되면 수사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어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평검사 요구 뭔가=5일 확정된 사개추위의 형소법 개정 초안에는 검찰 수사권 강화 방안은 빠져 있다. 논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사개추위의 입장이다. 평검사들은 4일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밝히면서 "국민 사법참여 재판의 윤곽이 마련돼야 그 재판제도에서 어떻게 증거를 제출하고 검사와 피고인 간에 공방이 이뤄질지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검찰의 반발이 조직 이기주의 차원에서 나온 게 아니라 선후가 뒤바뀐 채 형사사법 체계의 큰 틀이 잘못 짜이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는 주장이다. 보완적 장치도 없이 사개추위가 추진하는 대로 형소법 개정이 이뤄질 경우 피고인의 방어권은 강화되지만 부정부패 등 물증 없이 진술에 의존하는 사건 수사는 크게 위축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개추위가 유독 형소법 개정안을 서둘러 확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검사들은 수사권 약화를 겨냥한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본다.

한 평검사는 "사개추위 논의가 피고인 인권보호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문제"라며 "이제라도 수사권 강화책이 함께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법원이 증인을 강제 소환할 수 있는 것처럼 검찰도 수사시 참고인을 강제 소환할 수 있게 하자는 '참고인 구인제도', 증인이나 배심원 위협행위 등을 처벌하는 '사법방해죄' 등의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검찰 수사 단계에서 기소할 혐의가 있는지 없는지를 배심원들이 결정하는 '기소배심제', 선고 형량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양형기준법'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영상녹화물이 뭐기에=수사기관이 피고인.참고인 등의 진술을 녹화해 재판에 제출하는 영상 녹화물의 증거 인정 여부가 형소법 개정의 또 다른 걸림돌로 떠올랐다.

검찰은 신문 조서의 증거 능력도 사라지고, 피고인 신문도 제한받게 되는 상황에서 영상 녹화물만큼은 반드시 증거 능력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검사들 사이에서 "영상 녹화물만 증거로 인정되면 다른 쟁점들은 양보해도 좋다"는 말까지 나온다.

검찰은 영상 녹화물이 신문 조서와 달리 조작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판단으로 그동안 영상녹화 제도를 적극 추진해왔다. 이미 10여 개 일선 지검에 40여 대의 영상 녹화 장비를 설치했고, 이달 중에도 120대의 장비를 추가 설치할 계획이다.

하지만 사개추위는 영상 녹화물에 전폭적으로 증거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고문.협박의 우려가 여전히 남아 있고, 위.변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검찰의 주장대로 영상 녹화물의 증거 능력을 대폭 인정할 경우 과거의 '조서 중심주의' 재판처럼 '영상 녹화물 중심주의' 재판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조강수.김종문 기자

◆ 공판중심주의=현행 형사재판은 검사.경찰관이 피의자를 상대로 작성한 조서(調書)를 법정에 증거로 제출, 이를 근거로 진실을 가리는 조서중심주의다. 반면 공판중심주의 재판은 조서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검사와 피고인이 법정에서 각각 증거를 제출, 공방을 펼쳐 유.무죄를 가리는 방식이다.

*** '국민참여재판' 이란

사개추위와 검찰이 마찰을 빚고 있는 형사소송법 개정 문제는 '국민의 사법참여 재판(배심.참심 혼합재판)'의 도입과 맞물려 있다.

배심제는 시민들이 피고인의 유.무죄를 결정하고, 참심제는 시민들이 법관과 함께 판결하는 것인데 이 두 가지 요소를 혼합해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는 지난해 11월 배심.참심 혼합재판을 2007년부터 5년간 시범 실시한 뒤 2012년 전면 도입하는 방안을 건의했고, 이에 따라 사개추위가 법안을 마련 중이다.

이 방안에 따르면 사형 등 무거운 처벌이 예상되는 사건의 피고인이 원할 경우 일반 시민 5~9명이 재판에 참여해 피고인의 유.무죄 여부와 양형에 대한 의견을 법관에게 전달한다. 재판관은 시민들의 의견을 존중하되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배심.참심 혼합 재판이 도입되면 형소법 개정이 불가피하다. 수사기관이 미리 작성한 조서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현행 재판 방식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재판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법률 용어 등에 익숙하지 않고 방대한 자료를 재판이 열리기 전 읽어볼 수도 없다.

▶피고인이 부인할 경우 검찰의 신문 조서를 증거로 쓸 수 없고▶변호인과 피고인이 법정에서 나란히 앉도록 법정 구조를 바꾸는 등의 사개추위 형소법 개정안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일반인들이 유.무죄를 판단하려면 법정 안에서 모든 증거자료가 조사.진술되고 검사와 피고인이 동등한 입장에서 공격과 방어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개추위 관계자는 "현재 배심.참심 혼합 재판 관련 법안이 거의 완성된 상태"라며 "평검사들은 형소법 개정안이 국민 사법참여제도에 앞서 성급하게 마련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추진되고 있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김현경 기자

*** 사개추의 구성·운영

서울중앙지검 평검사들은 4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밀실 타협' '국민 참여 배제' 등의 거친 용어를 써가며 사개추위의 논의 과정을 비판했다. 검찰 내부에서도 "사개추위가 정치적 일정에 맞춰 졸속으로 형사소송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며 사개추위의 인적 구성과 의사 결정 구조를 문제삼고 있다.

사개추위는 2007년으로 예정된 형소법 개정안 시행과 로스쿨 도입, 법조 일원화 등 사법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지난 1월 대통령 자문기구로 발족했다. 활동 시한은 2006년 12월 말까지다.

공동위원장은 이해찬 국무총리와 한승헌 변호사다. 최종 의결기구인 장관급 본회의와 심의기구인 차관급 실무위원회는 교육인적자원부.법무부.행정자치부 등 관련 정부 부처 장.차관이 위원으로 위촉돼 사실상 '소(小)행정부'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또 형소법 개정 초안 작성 등 실무를 맡은 기획추진단의 단장은 현재 청와대 사법 개혁 비서관인 김선수 변호사다. 김 단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몸담았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사무총장 출신이다. 김 단장 외에도 사개추위 기획추진단에 민변 출신은 김인회 변호사 등 3명이 활동하고 있다. 사개추위에 청와대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검찰 관계자는 "사개추위의 실무진이 검사.판사.변호사.교수로 외형상 균형을 이뤘으나 개혁성향이 강한 변호사와 교수들이 대거 포진해 있어 검찰이 사실상 고립돼 있다"고 설명했다. 기획추진단에는 검사 4명이 파견돼 있다.

검찰은 또 사개추위의 의사 결정 구조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대통령령인 사개추위 규정에는 장.차관급 위원회의 경우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다수결로 정한다'고 돼 있다. 정부 부처의 장.차관이 많아 청와대의 의중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김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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