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도는 민방위 中] 민방위 장비 녹슨채 방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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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방위 조직의 형식적인 운영만큼이나 민방위용 장비들도 겉치레용이 많다. 우선 수량이 부족하고 품질도 떨어진다.

대부분의 장비가 자치단체 예산에서 쪼개내 확보하도록 돼 있어 늘 예산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때문이다.

그나마 얼마 안되는 장비의 관리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자물쇠가 녹슬어 열리지 않는 장비보관 캐비닛, 거의 써보지 않은 장비들엔 먼지가 수북히 쌓이거나 녹이 슬어 과연 제대로 작동될지조차 의심스런 것들이 부지기수다.

유사시를 대비한다는 구호가 무색하기만 하다

◇ 허술한 장비보관〓지난해 12월 서울 노원구 상계1동사무소 지하 민방위 창고. 굵직한 자물쇠가 잠긴 캐비닛 5개에 방독면.메가폰.수방장비 등 각종 민방위장비들이 보관돼 있다. 그러나 캐비닛 앞에 묵직한 복사용지 박스 등 사무용품들이 수북히 쌓여 있어 문 여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취재팀의 요청에 따라 담당직원이 열쇠로 문을 따려 했으나 화생방장비가 들어 있다는 캐비닛은 자물쇠가 녹슬어 열리지 않았다.

"지하실 습기 탓인가. 지난주엔 잘 열렸었는데…. " 직원은 녹 제거제를 가져와 뿌리는 등 갖은 애를 썼으나 결국 10여분 뒤 문 열기를 포기했다.

같은 날 서울 도봉구 창4동사무소. 지하 구내식당 한편에 판자로 벽을 세우고 문을 달아놓은 민방위 창고에 장비를 담은 캐비닛 3개가 놓여 있다. 못쓰는 전기밥통.밥그릇 등 각종 가재도구와 사무용품들도 함께 여기저기 쌓여 있다.

창고와 붙어 있는 구내식당에는 가스레인지와 가스파이프.솥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화재 위험도 걱정되는 형편.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의 경우는 민방위 창고 안에 대형 물탱크가 설치돼 있다. 습기 때문에 천장 구석 여기저기 곰팡이가 피었고 장비들의 금속 부분은 녹이 슬어 있다.

"방독면 정화통은 습도가 높으면 기능이 결정적으로 떨어진다" 는 게 화생방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지만 가산면 민방위 담당자는 그런 사실도 잘 모르는 듯했다. "문제가 있긴 있겠지만 보관장소가 마땅치 않아 어쩔 수 없다" 고 태연히 해명했다. 이처럼 민방위의 최일선 단위인 읍.면.동의 장비보관이 허술해 유사시 대비능력에 차질이 우려된다.

◇ 턱없이 부족한 장비〓현행 행정자치부의 민방위장비 관련 기준은 공통필수장비와 필수장비는 반드시 갖추도록 돼 있으나 수량은 지자체 자율에 맡겨져 있어 보유량은 제각각인 형편이다.그나마 모터보트 등 고가장비는 대부분 형식적으로 1~2개 정도만 갖추고 있어 실제상황에서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상습수해지역인 포천군의 경우 자체 예상소요량이 13대인 무전기는 단 한대도 없고 소화기도 17대 중 겨우 2대만 확보하고 있다. 이동식 발전기도 20대를 예상소요량으로 책정했으나 보유 중인 것은 한대뿐이다.

민방위 담당 노경만씨는 "장비 대부분이 국비지원 없이 자체예산만으로 구입케 돼 있어 예산책정과 의회통과 과정에서 늘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 라고 말했다.

인접한 연천군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 수해 등 비상사태시 조명용 전원 등을 공급하기 위해 필요한 비상용 이동발전기가 군 전체에 단 한대밖에 없고 소화기도 자체 예상소요량(1백19대)에 훨씬 못미치는 27대였다.

지난 여름 수해를 겪었던 파주시도 인명구조에 필수인 구명보트는 단 2대. 이처럼 수해 등 재난시 꼭 필요한 민방위장비의 경우 전국적인 보유현황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행자부에 따르면 현재 이동식 발전기 세트는 전국 소요량(5천4백10대)의 47%인 2천5백33대만이 확보돼 있으며 구명보트도 소요량 1천1백46대의 60%만 확보돼 있다.

◇ 지자체간 장비협조 부재〓부족한 장비나마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인근 지자체간 필요장비의 상호교류가 필수적이다. 행자부 관계자는 "유사시 부족한 민방위장비들은 다른 시.군 등에서 빌려다 쓰도록 하고 있다" 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대부분 자체 장비 외에 필요한 것은 군부대 등에서 지원을 받을 뿐 인근 지자체와의 장비교류는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파주시 민방위 담당자는 "수해 등 비상시에 인근 지자체와 장비교류를 해본 적이 없다"며 "사실 교류를 추진할 채널도 없는 상태" 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군 장비가 많아 별 어려움이 없다" 고 덧붙였다.

포천군 가산면 관계자도 "장비의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은 거의 없고 다 자체적으로 해결한다고 보면 된다" 며 역시 "군의 협조에 상당히 기댄다" 고 밝혔다.

군부대가 훨씬 빠르고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때문에 인근 지자체와의 공조체계 구축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군대가 출동하기 어려운 상황일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다 방법이 있을 것" 이라는 막연한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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