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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歌 작곡한 니에얼, 한국인 ‘영화 황제’에게 연인을 뺏기다

중앙일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위 사진)난징(南京)의 유서 깊은 구러우(鼓樓) 여관 문 앞에 선 왕런메이(왼쪽)와 니에얼. (아래 사진)왕런메이와 진옌(한국명 김덕린)의 결혼식 날, 니에얼(뒷줄 가운데)이 평소와는 다르게 굳은 표정으로 신랑과 신부의 뒤에 서 있다. 김명호 제공

중화인민공화국 국가(國歌)의 작곡자 니에얼(<8076>耳)은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의 이름 없는 한약방 집 막내아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청력이 뛰어났다. 서우신(守信)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다들 니에얼이라고 불렀다. 부친은 근엄한 것 외에는 말주변도 의술도 신통치 못했다. 명도 짧았다. 모친은 남편의 의서를 뒤적이다 글을 깨우친 총명한 타이(<50A3>)족 여인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약방에 앉아 환자들을 진맥하고 약방문을 써줬다. 복부에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오면 어린 아들을 불렀다. 니에는 환자의 배에 귀를 대고 한참 들은 후 소리를 설명했다. 모친은 “우리 니에얼, 우리 니에얼”하며 아들의 귀를 쓰다듬었다. 남편 생전보다 환자가 많았다.

니에의 모친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틈만 나면 노래에 얽힌 얘기들을 아들에게 해줬다. 공화제를 폐지하고 황제에 오르려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철퇴를 가했던 차이어(蔡鍔)의 영웅담을 소재로 한 노래를 특히 좋아했다. 부를 때마다 울먹였다. 차이가 밤마다 피를 토하고 35세의 나이에 숨을 거둔 대목에서는 통곡하기가 일쑤였다. 남편에 관한 얘기는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

니에얼은 중학시절 ‘종교·철학·과학은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형편이 되면 해외에 나가 견문을 넓히며 보고 싶은 책을 실컷 읽고 싶다.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돈만 모아지면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들어가 탄금(彈琴)과 독서로 평생을 보내고 싶다’는 작문으로 모친에게 기쁨과 우려를 안겼다.

니에얼은 타고난 음악의 천재였다. 배우지도 않았지만 굴러다니는 모든 민속악기를 다 다룰 줄 알았다. 15세 때 윈난사범학교에 입학해 독학으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지만 꿈은 군인이었다. 16세 때 고향을 떠나 후난(湖南)성 신병대에 입대해 군사훈련을 받고 이어서 황포군관학교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꿈을 접은 니에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사범학교를 마친 후 상하이로 나왔다. 제대로 된 곳에서 19세의 시골청년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마다 월급도 받기 전에 망해버렸다.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명월가무극단(明月歌舞劇團)’의 바이올린 연주자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해 견습생으로 합격했다. 한 달에 10위안을 받았다. 100위안이 모이자 엄마에게 50위안을 보냈다. 나머지 돈으로 싸구려 바이올린과 악보를 두 권 구입했다. 니에에게 바이올린은 꿈속에서도 소유할 수 없었던 사치품이었다. 신천지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밥만 먹으면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끼고 살았다.

명월가무극단에는 저우시엔(周璇)·완링위(阮玲玉)·왕런메이(王人美)·진옌(金焰)·자오단(趙丹)·쑨위(孫瑜) 등 당대의 스타와 감독들이 수두룩했다. 다들 활발하고 명랑한 니에를 좋아했다. 그는 특히 왕런메이와 친했다.

왕런메이는 후난성 창사(長沙) 여자였다. 니에보다 두 살 어렸다. 부친은 인근에 명성이 자자했던 수학교사였다. 마오쩌둥도 그의 제자였다. 후일 주석 신분으로 연예인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왕에게 “학생시절 너희 집에 자주 갔었다. 그때 기억이 나느냐?”고 물은 것을 보면 어설프게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니에와 왕은 정말 친했다. 중학교 교사였던 철학자 아이스치(艾思奇)와 화가 위펑(郁風) 등도 함께 어울렸지만 가끔이었다. 서로를 “Dry sister” “Dry brother”라 부르며 같이 밥 먹고, 영화 보고, 팔짱 끼고 산책하며, 놀러 다녔다. 들장미(野<73AB><7470>), 들고양이(野猫)라는 애칭에 걸맞게 자존심 강하고 사나웠던 왕런메이도 니에에게만은 신경질을 부린 적이 한번도 없었다.

진옌이 끼어들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진옌은 11세 때 중국으로 이주한 서울 출신의 한국인 김덕린(金德麟)이었다. 독립운동가였던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상하이와 톈진에서 힘들게 학교를 마쳤다. 17세 때 상하이의 한 영화사에 급사로 취직했지만 불과 2년 만에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적 여배우 중 한 사람이었던 완링위와 함께 ‘야초한화(野草閑話)’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진옌은 중국인들에게 때묻지 않은, 순박한 남성미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최초의 연기자였다. 청춘과 활력의 상징이었다. 상하이의 한 신문사에서 영화황제(電影皇帝)를 뽑을 때 경쟁자가 없었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잉디(影帝) 소리를 듣는 연기자는 진옌이 유일하다.

1934년 새해 첫날 왕런메이는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니에가 아닌 진옌이었다. 왕은 들고양이에서 집고양이(家猫)로 변신했다. 그래도 니에와는 여전히 친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下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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