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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세종시 ‘신뢰 가치’와 ‘책임 가치’의 공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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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고려 예종 때 묘청 일파는 서경(평양) 명당설을 내걸고 이곳으로 천도하면 36국이 조공을 바친다고 왕을 현혹했다.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켰다(1135년). 고려 말기에 이르러 민심이 이반하면서 한양(서울) 명당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왕씨(王氏)인 공민왕과 우왕이 한양 천도에 관심이 있었으나 한양의 주인공은 목덕(木德)을 가진 이씨(李氏)가 된다는 설 때문에 자가당착에 빠져 포기했다.

구시대의 막내를 자처했던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충청 천도가 기득권 세력의 교체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 충청 천도가 헌법재판소에 의해 무산된(2004년 10월) 뒤 당시 노 대통령 세력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세력이 타협해 만든 게 지금의 행정중심복합도시법(2005년 3월)이다. 이 타협에 반대해 한나라당의 박세일 정책위의장은 정계를 떠났고, 전재희 의원은 단식투쟁을 했다. 법안 통과를 책임졌던 김덕룡 원내대표는 직을 사퇴해야 했다.

오늘날 세종시를 둘러싼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대통령의 가치 충돌이, 무를 싹둑 자르듯 어느 한쪽만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역사적·정치적 성격이 배경에 있기 때문이다. 세종시는 말하자면 복합 성격의 소유자 같다. 야누스의 두 얼굴이다. 복합 성격자에게 절대 선, 절대 악은 없다. 선함과 악함이 공존한다. 야누스의 한 면만을 진실이라고 주장해선 안 된다. 이쪽 면의 진실을 묘사하면서 저쪽 면의 가치도 함께 인정해야 설득력이 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신뢰의 정치인이다. 그는 “정치는 신뢰다. 신뢰를 잃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이런 큰 약속이 무너지면 한나라당이 앞으로 국민에게 무슨 약속을 할 수 있겠느냐. 대한민국 국회가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한 약속이다”고 말했다. 세종시를 2005년 3월 통과된 법대로, 원안 그대로 9부2처2청 행정기관의 도시로 만들라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책임의 대통령이다. 그는 “대통령의 양심상 그대로 가긴 어렵다. 정권에 도움이 안 될지라도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오해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택해야 한다. 대통령은 나라와 국민의 미래를 위해 정책을 추진한다”고 말했다. 수도 분할과 유령 도시가 우려되는 세종시를 원안대로 끌고 갈 수는 없다는 고뇌가 깔려 있다.

누가 맞는 얘기를 하는가. 둘 다 맞는 얘기를 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럼 이 사설은 무력한 양시론인가. 그렇지 않다. ‘내 말만 맞고 상대방은 틀리다’는 두 사람의 인식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박 전 대표의 ‘신뢰 가치’와 이 대통령의 ‘책임 가치’는 공존할 수 있다. 주변 참모진과 지지세력들도 두 가치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모순된 가치라는 안이한 인식의 틀을 벗어나길 바란다. 가치는 공존할 수 있다. 가치 뒤에 숨은 욕심이 공존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가치와 욕심을 분리하면 세종시 문제는 해법이 보인다. 시간과 여론과 대안이 해법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정치인은 세금을 생활비로 쓰는 대신 시민이 풀기 어려운 문제를 골똘히 생각해서 풀어 내라는 의무를 진다. 주장만 하지 말고 문제를 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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