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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불황 속 희망의 싹 살짝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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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시장의 새벽이 예전 같지 않다.

이코노미스트 지난 10월 29일 새벽 6시 남대문시장. 대부분 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고, 띄엄띄엄 보이는 상인들은 해장술로 시름을 달래고 있었다. 6만6000㎡ 면적에 1만여 개 점포가 있는 남대문시장에선 더 이상 새벽시장의 참맛을 보기 어렵다. 경기침체 여파일까, 아니면 상인들이 게을러진 탓일까?

남대문시장 밀착르포 #“동대문에 주도권 뺏긴 뒤 고전 … 쾌적한 쇼핑공간 탈바꿈 부활 꿈꿔”

안경점을 운영하는 박병운(51)씨는 혼자 가게에 앉아 조용히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새벽기도를 막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예전엔 하루 종일 영업해도 일이 끝나지 않았죠. 1990년대 후반엔 한 달 매출을 1억5000만원까지 올렸어요. 요즘은 한 달에 6000만원 올리기도 힘든데….”

박씨는 “가게 문을 열기 전 새벽기도라도 다녀와야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불황 한파를 온몸으로 버티고 있는 자영업자의 애환이 읽힌다. 상가 1, 2층을 사용하는 박씨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있다. 바로 금리 인상이다. 가게 유지를 위해 1억원 정도의 신용대출을 받은 박씨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는 “올 연말에 장가를 가는 아들의 혼수 장만을 위해 대출을 더 받아야 하는데 선뜻 결정하기조차 어렵다”고 했다. 날이 밝고 나서야 시장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조금씩 이어졌다. 통계에 따르면 하루 평균 30만 명 정도가 남대문시장을 찾는다. 이 와중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시장을 찾아오지만 상인들은 이들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삼익토탈패션타운 4층 구두매장에서 20년 넘게 장사를 한 박칠선(51)씨는 “매출이 10년 전에 비해 20분의 1밖에 안 된다”며 한탄했다. “동대문시장이 들어서면서 손님이 부쩍 줄었다”고 했다. 그나마 단골에 의지하며 버티는 중이다. 박씨는 “경기가 좋을 땐 밑창만 떨어져도 새것을 사러 왔는데, 요즘은 밑창 고쳐 달라는 손님이 대부분”이라며 “내일은 잘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산다”고 말했다.

20년 넘은 오래된 건물이지만 박씨의 가게가 있는 삼익토탈패션타운은 한때 잘나가는 도매상가였다. 이 상가는 동대문보다 10년 빠른 1980년 중반에 지어졌다. 한때 이 타운에는 20~30대 손님이 북적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죽은 상가로 전락한 지 오래다. 영캐주얼 매장이 있던 지하 1층은 텅 비어 있다.

결정적인 타격은 동대문시장이 화려하게 개발되면서 의류시장이 그곳으로 넘어간 탓이었다. 여기에 한몫한 것이 바로 주차장이다. 삼익토탈패션타운 총무부장은 “비싼 주차료와 협소한 공간 때문에 지방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상인들이 동대문으로 간다”며 “이들이 동대문시장을 찾다 보니 여기 있는 상점들이 동대문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금리 인상 소문에 냉가슴 앓는 남대문 상인

삼익토탈패션타운만 활기를 잃은 것은 아니다. 주변 상가 모두 같은 처지다. 삼익토탈패션타운 건너편에 위치한 대도종합상가. 이곳에서 가죽벨트를 취급하는 공재숙(69)씨는 전자기기를 파는 이웃 상인에게 “아직도 개시 못했어?”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 이웃 상인은 고개만 끄덕였다.

오후 4시가 넘었는데, 물건 하나 못 팔았다는 얘기다. 장사가 안 되긴 공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임차료를 열 달째 못 내고 있다”며 푸념을 늘어놨다. “이 상가에서 적자 안 보고 돈 버는 곳은 다섯 집도 안 돼요. 한번 둘러보세요, 손님이 있나.” 공씨는 나름의 분석도 내놨다.

“지방 소매상이 다 망하는 바람에 새벽 도매시장까지 죽었다”는 것이다. 공씨 말에 이웃 상인이 슬쩍 거든다. “대형마트가 전국 곳곳에 들어서면서 지방 소매상들이 문을 닫으니 남대문에 물건을 떼러 오는 상인이 확 줄었어요. 대형마트도 그렇지만, 인터넷에서도 물건을 싸게 파니 점포 내서 장사하는 우리가 당해낼 재간이 있나요? 뭐, 어차피 힘센 사람들이 이기는 세상 아닙니까?”

그나마 남대문시장의 버팀목이 돼 줬던 외국 손님도 요즘은 뜸하다. 한 건강식품 가게 주인은 “3월까지는 환율 때문인지 일본 손님들이 꽤 왔는데, 여름이 지나면서 다시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볼거리도 없으니 누가 오겠어”라며 혀를 찼다.
불타 버린 숭례문도 악재가 됐다.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일반적인 관광코스는 경복궁과 남대문을 거쳐 남산타워에서 이태원으로 이어진다. 여행 가이드들은 외국인들이 남대문에 머물 때 남대문시장으로 곧잘 인솔해 왔다. 하지만 숭례문이 불타 버린 후에는 경복궁에서 바로 남산타워로 가 버린다.

한때 남대문에서 액세서리 장사로 열 손가락 안에 꼽혔다는 김모(67)씨는 “90년대 후반만 해도 상가 세 칸에 직원을 8명 쓰면서 한 달에 2억원까지 벌었는데 지금은 100만원 벌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외국 바이어들이 찾아와 수출을 많이 했는데, 요즘은 중국 물건이 넘치면서 바이어들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 앉아 있으면 장사가 안 되는 걸 다 알 수 있어요. 봉투장사와 액세서리 도금공장 하는 사람에게 요즘 얼마나 파느냐고 물어보면 알죠. 장사가 잘되면 상점에서 봉투를 많이 찾을 것이고, 액세서리가 잘 팔리면 도금 맡기는 상인이 많을 텐데 통 없데요. 여기는 전멸이에요, 전멸. 나도 재고만 다 팔면 장사를 접을 거예요.”


숭례문 화재 후 외국인 관광객 뜸해져

남대문시장 전체를 관리하는 남대문시장주식회사 백승학 부장은 “매년 매출이 15~25% 줄어드는 추세”라며 “매출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던 도매가 줄어든 것이 큰 타격”이라고 말했다. 백 부장은 그 원인을 “수입개방과 대형유통점 확대에 있다”고 했다. 중국에서 싼 물건이 밀려오고, 주 고객인 소매상인은 대형마트에 치이다 보니 남대문시장도 버티기 힘들다는 얘기였다.

그는 “남대문시장을 살리기 위해 정부에서 지원을 받아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해 보려고 했는데 거의 망했다”며 “유명 인터넷 포털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하고 경쟁하기에는 자본의 규모 면에서 승산이 없다”고 전했다. 희망은 없는 것일까? 백 부장은 “그래도 600년 역사와 한국 최대의 재래시장이라는 자부심은 잃지 않고 있다”고 했다.

“요즘 정말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일합니다. 남대문이 더욱 쾌적한 쇼핑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환경정비 사업도 올해 진행했어요. 낡은 도로 정비하고, 쓰레기 매립지와 전신주를 지하화하는 작업도 곧 완료됩니다. 무엇보다 남대문시장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관리업체가 아무리 노력해도 상인들이 직접 발 벗고 나서지 않으면 힘들거든요.”

그의 말은 다시 길게 이어진다.

“남대문시장의 진정한 주인인 상인들이 양보하고 타협하면서 더 힘을 모아주셨으면 합니다. 어려운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살아남기 위해 힘을 모은다면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남대문시장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장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함현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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