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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키워드] 25. 기술제국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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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0세기 전반기가 서구에 의한 비서구의 지배, 즉 '제국주의(imperialism)' 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면 20세기 후반기는 제국주의가 해체되고 비서구가 수많은 민족국가들로 독립해 발전을 추구한 시기였다.

이때 비서구 국가들이 추구한 발전의 모델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대부분 자신의 식민종주국이었던 서구사회를 모방한 것이었으며 이를 가리켜 우리는 '근대화(modernization)' 라 불렀다.

그래서 탈냉전 이전까지 세계는 근대화된 서구 자본주의권을 가리키는 제1세계, 근대화된 동구 사회주의권을 가리키는 제2세계, 비근대화된 나머지 비서구권을 가리키는 제3세계로 흔히 분류됐다.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이런 구분은 이제 무의미해졌으나 제1세계와 제3세계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제3세계 국가들은 근대화를 추진하면 서구와 같은 발전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결과적으로 서구에의 새로운 종속을 초래했다.

그 결과 북(부국)과 남(빈국)의 발전 격차는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화돼 왔다.

소수에겐 주체 못할 부가, 다수에겐 배고픔이 쌓여가는 이 불평등의 악순환은 이제 21세기에 인류가 당면한 가장 중대한 문제의 하나로 부각되고 있다.

지구화.정보화로 대표되는 현재의 세계 추세는 식민주의와 근대화가 초래한 이러한 북.남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오늘날의 무차별한 세계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우수한 기술을 지닌 서구의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기술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거대 다국적기업들은 지적재산권으로 이들 기술을 보호하면서 시장 지배를 꾀할 뿐 아니라,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들여 더 첨단기술을 개발함으로써 독점적인 위치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예컨대 정보기술분야의 아이비엠(IBM).인텔.마이크로소프트(MS) 등과 생명공학분야의 몬산토.노바티스 등이 그 대표적인 기업들이다.

이렇게 보면 제1세계가 제3세계, 그리고 전체 지구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기술이며 이러한 현실을 '기술제국주의' 라는 말로 압축해 부르곤 한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계속되는 한 21세기는 이런 새로운 제국주의의 암울한 시대가 될 공산이 크다.

제국주의에 맞서 제3세계의 민족주의가 나타났듯이, 기술제국주의 추세에 대응해 오늘날 많은 제3세계 국가에서는 '기술민족주의' 와 같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고취되고 있다.

즉 많은 제3세계 정부와 과학기술자들은 기술도입과 더불어 자체 기술개발에 매진해 시급히 기술자립을 이룰 것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얼핏보아 그럴싸한 이 기술민족주의는 서구를 모델로 한 '근대화' 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따라서 실패할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 현재 서구 자체가 환경파괴와 사회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근대 과학기술에 대해 심각한 반성을 하고 있는 중이다.

기술제국주의와 종속은 단지 3세계의 과학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제3세계가 서구의 과학기술을 무비판적으로 흡수.모방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신자유주의 세력이 지배하는 과학기술에 대한 의사결정 독점을 제1세계와 제3세계의 시민대중이 연대해 깨뜨리고 시민참여권을 확보함으로써, 제3세계의 각 지역조건에 맞는 다원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을 촉진하는 일이 기술제국주의를 극복하고 진정한 '지구촌' 을 만드는 데 급선무라 하겠다.

김환석(국민대 교수, 과학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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