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순교자와 테러리스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아비규환의 참상으로 막을 내린 러시아 인질사태의 진압 과정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희생자를 줄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의 한계를 초월한 묵시록적 비극의 성격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성싶다. 자신의 몸에 두른 폭탄을 터뜨려 인질과 함께 자폭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협상한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가.

죽음을 각오하고 막무가내로 나오는 사람만큼 파멸적인 존재는 없다. 뼈에 사무치는 원한과 분노, 작은 희망의 불씨조차 사라진 뒤의 극단적 절망과 좌절, 자신만이'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맹목적 자기확신은 일종의 환각상태를 유발한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래서 상상조차 못한 일도 현실이 된다. 납치한 여객기로 자폭 공격을 감행하고, 죄없는 외국인의 목을 치기도 한다. 무고한 사람들 틈에서 몸을 산산조각 내 산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끔찍한 테러리스트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순교자라고 믿는다. 순교와 테러의 모순이다.

전쟁터에서는 살인마가 영웅이 된다. 테러리스트와 순교자가 그렇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한 안중근(安重根)은 우리의 눈에는 분명 의사(義士)고 열사(烈士)지만 일본인들은 테러리스트로 기억한다. 선량한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면 테러지만 원한에 책임이 있는 당사자를 골라 처단하면 의거라는 구별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집으로 돌아가면 소중한 남편이고 아내고, 아버지고 어머니며 자식이고 형제다. 복수의 칼날은 통쾌할지 몰라도 피는 다시 피를 부르게 마련이다.

체첸 문제는 힘으로 눌러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무력을 앞세운 강압책으로 체첸인들의 분리독립 욕구를 일시 억누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잠재울 수는 없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체첸전쟁 승리로 권력을 잡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체첸 문제의 양보를 권력기반의 상실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강경노선을 고집해 왔고, 그 참혹한 대가를 죄 없는 백성들이 치르고 있다. 이질적 요소로 구성된 연방을 끌고 가야 하는 러시아의 국가적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각오한 수많은 자칭 '순교자'와 그 희생자들이 흘린 피를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의 국가체제가 과연 있는 것인지 러시아는 심각히 고민할 시점에 왔다.

그러나 이게 어디 러시아만의 문제인가. 역사적으로 지배와 억압, 불신과 오해가 있는 곳에는 순교와 테러의 모순이 있어 왔다. 지금도 그 모순은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권 사람들의 불만과 요구를 미국이 좀 더 진지하게 경청하고 이들과 대화하는 태도를 보였던들 9.11테러와 같은 끔찍한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렇지 않았던 탓에 미국은 지금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에는 티베트, 영국에는 북아일랜드 문제가 있다. 스페인에는 바스크 문제가 있다. 정도의 차이뿐이지 테러의 공포가 늘 잠복해 있는 곳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분노와 원한, 좌절과 실의에 빠져 생명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다독이고 마음 쓰는 일은 결국 위정자들의 몫이다. 또 가진 자들의 몫이기도 하다. 권력과 돈을 가진 기득권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것만이 테러를 순교로 착각하는 어리석은 테러리스트들이 나오지 않도록 예방하는 길이다.

배명복 순회 특파원 <워싱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