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랑이 쓴 '나와 납북·월북자 이야기'] 무슨 내용 담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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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북한 평성과학원 출판부 기자를 지낸 성혜랑(成蕙琅)씨가 3년여 동안의 침묵을 깨고 세상에 내놓은 원고는 문학작품도, 자서전도 아닌 월북.납북 인사들의 북한 생활 소식이었다.

成씨는 서문에서 "이산가족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탈북 직후부터 잘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되살려 '북에 온 의용군(월북.납북 인사)' 들의 소식을 정리했다" 고 밝혔다.

북한에 가족을 두고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어 애태우고 있는 남한의 이산가족들에게 북으로 간 가족들의 '소식' 을 전해주겠다는 뜻이었다.

成씨가 기억을 떠올려 북한식 한글타자기로 직접 기록한 월북.납북 인사는 2백20명.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부친 조헌영, 이화여전 영문과를 수석졸업한 여류작가 이정수, 북한 핵의 이론적 기초를 다진 핵물리학자 정근, 안중근 의사 조카의 맏딸 안기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거부한 남편 때문에 일생을 기능공으로 보낸 북한 최고의 여류작가 임순득씨 등.

成씨가 잘 아는 31명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대로 다 써서 북쪽의 '인간 생활' 을 가능한 한 많이 엿볼 수 있게 2~3쪽에 걸쳐 서술했다.

맨 처음 쓴 것은 成씨와 서울사범 부속국민학교 동창이었던 황원영씨에 관한 얘기.

"부잣집 외아들인 원영이는 전쟁통에 얼떨결에 바이올린 선생 문학준씨를 따라 38선을 넘었다… 54년 김일성대학 강당에서 인민군협주단의 일원으로 공연하러 온 원영이를 만났다… 이후 원영이는 말썽을 부려 끝내 제대한 뒤 강선제강소 서클지도원으로 내려갔다…. "

成씨는 "혹시 그 애 어머니께서 살아계시면 '원영이가 살아있다, 잘 있다' 는 이 소식을 무척 반가워할 것" 이라며 소식을 전하는 이유를 밝혔다.

안기애씨의 소식은 이렇게 전했다.

"기애는 65년 출판사 편집부에 수학전문가로 배치됐다. 남동생(기호.기철.기영) 셋이 있는데 기애가 세대주로 이들을 데리고 있었다. 작은 삼촌이 있었는데 전쟁 때 정신병원에 들어간 뒤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기애네 식구는 당의 보살핌을 받아 정치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어려움이 없었다. "

成씨는 조헌영씨에 대해 "…선생의 부고가 '로동신문' 에 났었다. 연대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께서 그분은 90세가 넘으셨다고 하시던 것만 생각난다" 고 적었다.

임순덕씨에 대해선 "남편 장선생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받아들이지 않아 예술생활도, 직장도 거부하고 부엌데기 노릇을 맡아 했다.

축출자 명단에 들어 고건원 탄광에 두 분이 가셨는데 단칸방에서 사과궤짝을 엎어놓고 여전히 글을 쓰시며 기능공으로 계신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20년 전" 이라고 썼다.

최승희의 조카딸 최로사씨 등 成씨가 조금씩 알고 있는 나머지 1백89명에 대해서는 '그 가족들이 생사를 알 수 있게 나이.고향.직업 정도를 아는 만큼' 짤막하게 서술했다.

단행본 '소식을 전합니다' 로 출간할 成씨의 원고는 월북.납북 인사들의 북한 생활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해방 직후의 남한 사회상, 사회주의를 선택했던 월북 인사들의 인생역정, 납북 인사들의 삶, 북한식 외래어 등을 엿볼 수 있어 사료의 가치도 지녔다.

成씨는 서문 마지막 부분에서 "인도적 감정으로 엮은 나의 작은 책자가 '남북대결' 의 그 어떤 정치적 자료로도 이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이라고 밝혔다.

이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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