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시급한 '경수로터' 문화재 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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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15일 한국전력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본 공사계약을 체결했다.

지난 97년 8월에 시작된 부지 정지공사가 시작된지 2년4개월만의 일이다.

남북한 관계의 변화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는 역사적인 민족의 대사업이 이제 본 궤도에 올랐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앞으로 이 사업이 몰고올 한반도 정세 변화에 큰 기대를 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 경수로사업이 처음 제기될 때부터 이 지역에 대한 문화재 조사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관련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지만, 본 공사 계약이 되도록 아직도 문화재 조사에 대한 한전과 정부의 입장은 전혀 밝혀진 것이 없다.

함경남도 금호지구에 서게 되는 경수로 부지는 약 2백50만평이다.

이 지역에는 이미 북한학자들에 의해 몇가지 중요한 문화유적이 조사돼 있다.

해안 쪽으로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있고, 구릉 쪽으로는 청동기시대의 유적들과 함께 동예(東濊)와 발해의 유적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알려진 유적들은 실제로 잠재(潛在)된 유적들의 아주 일부에 불과할 것이며 많은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미 남한지역의 강릉이나 동해지역이 개발되면서 나타나는 유적들의 밀도로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금호지구의 문화유적들은 민족형성사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이다.

선사시대에 두만강에서 남쪽 해안으로 이어지는 문화와 인구의 흐름, 동예의 문화적인 정체, 그리고 고구려와 발해의 대(對) 일본 교역로를 밝혀 줄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금호지구에 대해 문화재 조사를 하지 않고 공사를 진행한다면 우리 정부는 몇가지 중요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첫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과 인류의 공동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재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되는 대규모 사업에서 사전에 문화재 조사를 실시하지 않고서 공사를 강행하는 것은 유네스코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으로 국제적인 지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유네스코는 이미 1968년에 "공공 및 개인적 작업에 의해 위험시되는 문화유산 보존에 관한 권고문" 에서 이러한 대규모 사업에 앞서 문화재 조사를 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우리의 중요한 문화재를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 우리의 국력을 국제적으로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만일 문화재 조사를 하지 않고 공사를 강행한다면 그간 쌓아올린 명성을 잃을 수 있다.

둘째, 국내의 문화재 보호법에도 저촉된다.

우리의 문화재 보호법은 토지형질을 변경하는 공사에 앞서 문화재 조사를 실시하게 돼 있고 이러한 법정신은 지난 6월 개정때 강화돼 1만평 이상의 건설공사는 모두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게 돼있다.

물론 북한지역이어서 국내법이 미치는 범위 밖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남한이나 북한 모두 아직까지는 2국체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며 법의 정신은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의 법도 공사 전에는 조사를 하게 돼 있고 민족문화 유산의 구제에 남북한이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설사 다른 나라라고 하더라도 앞에서 말한대로 대규모 공사는 반드시 문화재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셋째, 남북한 교류확대의 중요한 계기를 놓치게 될 것이다.

근래 남북한은 서로 조심스럽게 체육과 공연예술 등에서 교류를 시작하고 있는데 학술분야에서도 교류가 확대돼야 할 것이다.

특히 문화유산 연구분야의 교류는 민족공동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최우선 과제로 생각되는데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우리 정부가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경수로 사업지구 뿐만이 아니다.

현대가 개발하고 있는 금강산 지구나 앞으로 개발할 지역도 공사에 앞서 문화유산 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정부나 대기업이 북한지역을 개발하는 경우 반드시 문화재 조사에 대한 기본원칙을 분명히 정하고 실행에 옮기려는 노력이 있지 않으면 안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북한당국이 거절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전혀 없다.

문화재 조사를 제안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상대적으로 성숙한 문화사회라는 것을 보여 줄 것이며 우리 정부의 대외 이미지를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유적은 한번 파괴되면 영원히 사라진다.

하루속히 문화재 조사에 대한 계획을 수립해 민족간의 전기가 될 사업의 의미와 효율을 높이도록 하는 것이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배기동 한양대교수.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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