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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신종플루 패닉 관리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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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뉴스속보입니다. 뉴저지주의 글로버즈밀에서 1500명이 사망했습니다. 적들은 하늘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며 레이저 광선을 쏘고 있습니다. 화성인이 침공한 것 같습니다."

1938년 10월 30일. 영화 시민케인의 감독 겸 배우로 유명한 오손 웰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CBS 라디오 전파를 탔다. 핼러윈 특집으로 마련한 드라마 '우주전쟁'에서다. 당장 큰 혼란이 왔다. 패닉에 빠진 이들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방송 전에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소용없었다. 수백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 집단 패닉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오기도 한다.

패닉이 닥치면 선택은 둘 중 하나다. 버티거나 휩쓸리거나. 어느 게 나을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금융시장의 연구 결과는 대개 잘 버티면 큰 이득이라는 쪽이다. 패닉을 집중 분석한 월가의 투자가 짐 크레이머는 "패닉은 투매의 (시작이나 중간이 아니라) 끝에서 온다"며 "시장의 공포지수가 최고점에 달했을 때가 바로 주식을 살 때"라고 주장했다. 이런 이론을 실천해 큰 돈을 번 이도 수두룩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투자의 귀신 워런 버핏이 대표적이다.

버티기 보다 휩쓸릴 때가 나을 때도 있다. 뱅크런(예금 인출 사태)이 그렇다. (경제 위기 등으로)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예금을 찾으려고 몰리면 은행은 헐값에라도 가진 자산을 팔아 돈을 내줘야 한다. 결국 파산에 몰리게 된다. 이럴 때는 패닉을 버텨낸 예금자들이 패닉에 휩쓸린 이들보다 더 큰 피해를 보게 된다.(폴 크루그먼 『불황의 경제학』)

경제 쪽과 달리 질병 쪽의 패닉은 좀 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혼란과 비이성적 행동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그러다 보니 휩쓸리는 게 좋을지, 버티는 게 좋을지 판단하기 어렵다. 요즘 대유행에 들어선 신종플루가 딱 그렇다.

대세는 휩쓸리기다. 벌써 보건복지부나 질병관리본부에는 백신을 먼저 맞게 해달라는 요청이 몰린다고 한다. 이유도 갖가지다. 해외 출장을 앞두고 있다, 수험생을 돌봐야 한다, 접객 업소 종사자다 등등. 아직은 읍소형이 대부분이라지만 힘센 기관의 청탁도 꽤 있다고 한다. 대통령이 "순서대로 맞겠다"고 솔선수범했지만 약발이 안듣는 셈이다. 하기야 패닉에 휩쓸린 이들이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은 없었다.

버티는 쪽도 만만찮다. 어린 자녀를 둔 주부들 사이엔 요즘 백신 기피증이 퍼지고 있다. 압구정동의 한 주부는 "중국산 백신이 섞여 있고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내 아이에겐 접종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감보다 치명적이지 않은 신종플루를 예방하려다 잘못되는 게 더 두렵다"고 덧붙였다.

이뿐 아니다. 지난달 말 분당의 A초등학교는 휴업했다. 하지만 같은 날 길 건너편 B중학교는 운동회가 한창이었다. 휴업의 재량권을 가진 학교장의 판단이 제각각이어서다. 심지어 같은 학교에서도 다르다. 1학년만 휴업한 D고등학교의 3학년 이모양은 "요즘처럼 동생이 부러울 때가 없다"며 "입시생이라고 차별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같은 학교 1학년인 동생은 사흘째 휴업 중이다.

패닉은 정부라고 봐주지 않는다. 역시 선택을 강요한다. 휩쓸리거나 버티거나. 그러나 정부가 휩쓸렸다간 문제가 커진다. 대책이 한발 늦거나 우왕좌왕하기 십상이다. 그렇찮아도 부처간 이견이 많아 조율이 쉽지 않다고 한다. 독감보다 치명적이지 않다는 쪽과 전염력이 폭발적이니 더 조심해야 한다는 쪽이 맞선다고 한다. 벌써 정부 스스로 패닉에 휘둘리고 있지나 않은 지 걱정이다.

지금은 플루보다 무서운 게 패닉이다. 알프레드 마샬은 "붐비는 극장에 성냥불 하나가 떨어지면, 화재보다 공포가 참사를 낳는다"고 했다. 패닉을 막는 첩경은 첫째도 신뢰요, 둘째도 신뢰다. 정부부터 확신을 갖고 앞장 서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투명하게 관리해야 한다.'무조건 믿어라'는 식은 곤란하다. 이 땅에서 패닉은 주로 정부 발표와 대책이 못 미더울 때 커졌다. 이미 지난해 광우병 사태 때 질리도록 배운 교훈이다. 중앙SUNDAY 경제에디터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