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공기업 사장들 어찌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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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신문보도를 보니 청와대가 흔들리는 공직기강을 잡기 위해 나섰다고 한다.

청와대는 특히 공기업을 점검해 구조조정을 하지 않은 사장 5~6명을 면직시킬 예정이다.

이런 보도를 보니 얼마전 구속된 강희복(姜熙復)전 조폐공사 사장이 생각난다.

그는 과도한 구조조정을 하다 업무방해죄로 구속됐다.

보통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사장이 업무방해를 한다는 게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제3자가 회사의 업무를 방해하는 일은 있겠지만 사장이 업무를 방해한다□ 그런데 검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더욱 어려워진다.

자연인 강희복이 공기업인 조폐공사의 노조파업을 유도해 결과적으로 조폐공사의 업무가 방해됐다는 것이다.

보통 사장이라고 하면 기업의 대표이기 때문에 외견상 기업과 동일시되는 게 상식이다.

그래서 사장이 밖에 나가 한 말은 회사의 방침일 것으로 모두 믿는다.

말은 사람이 했지만 그 사람이 맡고 있는 직책이 사장이므로 해당 기업의 대표기관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상식으로 판단하면 사장의 공적인 행동을 자연인의 행동으로 보기는 어렵다.

문제는 이같은 우리의 경험칙과 검찰의 잣대가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이제 공기업의 사장은 섣불리 주인의식을 가져서는 안될 것 같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리해고 등 구조조정을 하려다 노조의 반대에 부닥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대로 밀고나가면 노조는 파업을 할 것이고 자칫하면 파업유도를 했다며 '업무방해죄' 로 구속될지도 모른다.

이제 공기업 사장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가만히 있으면 공직기강해이요,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이면 업무방해이기 때문에 중간쯤 어느 선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절묘한 해법을 찾는 것과 기회주의적.보신적 태도와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일까.

미국에서는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 관행이 있다.

최고경영자의 경영책임이 문제될 때는 '그 사람이 특별히 잘못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라도 그런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를 따져보는 것이다.

경영판단의 규칙(Business Judgement Rule)혹은 BJR로 불리는 이 원칙은 사외이사제의 운용을 최우선적으로 본다.

그 회사에 사외이사제가 도입돼 있는지, 사외이사들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았는지, 그리고 최고경영자가 사외이사들과 충분히 상의했는지를 따지는 것이다.

모든 증거로 미루어 긍정적이라는 결론이 나오면 최고경영자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미국의 판례다.

이렇게 본다면 조폐공사의 경우도 姜 전사장이 사외이사들과 상의했는지 또는 외부 전문가들에게도 충분히 조언을 구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姜전사장이 노조를 탄압할 목적으로 파업을 의도적으로 유도했다면 물론 유죄다.

그러나 사외이사든, 바깥의 전문가들이든 조폐창의 통폐합을 서둘러야 한다고 조언했다면 문제는 달라지는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가 다른 공기업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방향은 전혀 엉뚱하게 가고 있다.

청와대는 공기업에 '암행감찰' 을 하겠다는 것이다.

공직기강의 이완이 위험수위에 육박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기업의 경영상태나 기강의 이완 정도는 컨설팅회사에 용역을 주든지, 아니면 감사원의 감사를 받게 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암행감찰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기껏 풍문이나 투서 등 비공식적 정보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공기업을 평가한다는 소문이 나면 공기업의 사장들은 더욱 위축될 것이다.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투서를 받지 않으려면 말썽의 소지가 많은 개혁보다 인정 많고 착한 사장이 되는 게 유리하다.

구조조정을 느슨하게 하고 판공비를 많이 써 회식을 자주 시켜주며 비리에 연루돼 나가는 임직원에게도 사후배려를 잘 해주는 게 좋다.

공기업의 기강을 제대로 잡자면 전근대적인 암행감찰보다 평가 자체를 투명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어느 선진국도 암행감찰로 공기업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공기업의 구조조정을 다루는 방식을 보고 민간기업들은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

재판결과를 지켜봐야 하겠으나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의 처리는 우리 기업의 구조조정에도 엄청난 영향을 줄 것이다.

똑같은 노조파업을 두고 검찰이 조사하면 이런 결과가 나오고 특검이 조사하면 저런 결과가 나온다면 누가 소신있게 구조조정을 하려 들겠는가.

미국처럼 판례가 확립되든, 검찰이 어떤 원칙을 세우든 안심하고 기업경영을 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유한수 전경련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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