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의 20세기 여성인물] 여성운동가 故 이태영 박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4면

17일 오전 11시 서울 여의도 소재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는 이희호 여사를 비롯, 강원룡 크리스챤아카데미 이사장.정의숙 이화학당 이사장.윤후정 전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한승헌 전 감사원장 등 우리 사회의 쟁쟁한 별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지난해 12월 17일 타계한 여성계의 큰별 고(故) 이태영 여사 서거1주기 행사다.

'우리나라 여성운동에는 이태영 박사 전(前)과 후(後)가 있다' 고 할 정도로 이태영 박사는 여성운동에 한 획을 그었다.

앞으로 이태영 박사만큼 큰 족적을 남길 여성운동가가 나올 것인가. 이 질문에 누구도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다. 그만큼 그의 공헌은 크고 뚜렷하다.

여성들이 결혼해 종처럼 일하다 쫓겨나도 '소박맞았다' 며 십원 한푼 받지 못하던 시절, 이혼한 여성은 친권이 없어 자식을 포기해야만 했던 시절, 출가한 딸은 상속받지 못하던 시절에 그는 여성들의 절규를 들었고 평생 이들을 위해 싸웠다.

1914년 평북 운산에서 태어난 그는 36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교사 생활 중 정일형(鄭一亨)박사와 결혼했다. 32세 되던 해 네 아이의 어머니로, 여성으로는 최초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6년 뒤인 52년에는 사법고시에 합격한 첫 여성이 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남편이 야당의원이라는 이유로 판검사 임용을 반대하자 변호사로 나섰다.

만일 그가 성공한 변호사로 평생을 살았다면 '비범하고 똑똑했던 여성' 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56년 '여성법률상담소' 를 설립해 힘없는 여성들을 위해 온몸으로 싸웠다.

그리고 그 구체적 목표는 '가족법 개정' 이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부소장은 "처음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더니 자신의 사연을 말하며 통곡하는 여성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결국 여성의 산 같은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 간판을 법률상담소로 바꿔 다신 거죠" 라고 말한다.

그의 가족법 개정운동은 89년 이혼여성의 재산분할청구권을 인정하고, 모계.부계 혈족을 모두 8촌까지 인정하도록 하는 결실을 보았다. 이때 그는 "마침내 사람 차별의 역사를 종식할 수 있게 되었다" 며 감격해 했다.

李박사는 여성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 투사이기도 했다. 유신정권하인 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76년 3.1민주 구국선언에 참여해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김대중 대통령 내외와 두터운 교분도 이런 '민주동지' 의 산물이다. 서거 1주기를 기념해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이희호 여사는 "80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남편이 구속됐을 때 어느 변호사도 변론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태영 박사는 증인으로 법정에 나섰다" 며 '생명의 은인' 으로 그를 회고했다.

이경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