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레터] 아이디어 앞에 불황은 없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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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Make Love Like a Porn Star』. 한글로 옮기면 ‘포르노 스타처럼 섹스하는 방법’ 정도 되겠습니다. 1999년에 출간된 서갑숙씨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연상시키는 제목입니다. 그렇다고 대중의 호기심에 영합한 그렇고 그런 책이려니 짐작하면 곤란합니다. 미국의 포르노 배우 제너 제임슨이 쓴 이 자서전은 서점 구석에 처박혀 있던 섹스 관련 서적을 독자들의 눈에 잘 띄는 진열대로 끌어낸 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부피도 자그마치 579쪽에 달합니다. 발매 2주일을 막 넘긴 지금 이 책은 미국 각종 매체의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올라 있습니다.

미국 출판계도 소재의 빈곤을 느껴서 그럴까요. 섹스 관련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전과 다른 점은 이 책들의 내용이 알차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How to Make …』의 경우 우선 저자가 너무나 솔직합니다. 그리고 포르노 배우로 내몰릴 때까지 산전수전 다 겪은 여인이 마침내 가정을 이루며 훌륭한 아내로, 엄마로 정착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가족의 가치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자칫 퇴폐적으로 흐를 수 있는 성을 멋지게 포장해 인문교양서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미국의 섹스 관련서 바람을 조금 더 열어볼까요. 이 가을에 나올 책만도 오르가슴의 역사나 매춘의 역사, 포르노그라피 영화산업의 발전사 등 수없이 많습니다. 작가인 고어 비달과 살만 루시디, 영화배우 존 말코비치까지 나서서 포르노그라피와 문화의 상호작용에 관한 에세이를 쓰고 있답니다.

그런데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는 우리 출판계는 어떻습니까. 소재 개발을 통해 독자층을 넓혀가야 할텐데 마음만큼 노력이 따라주지 않는 듯합니다. 한문 고전을 바탕으로 역사에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책들이 성과로 꼽힐 정도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참신한 아이디어가 기다려집니다.

정명진 기자 Book Review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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