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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과 함께 스러진 ‘마지막 승부’의 추억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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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호 16면

실업농구 삼성의 레전드
프로농구 삼성 썬더스의 코치 김현준은 1999년 10월 2일 새벽에 사망했다. 교통사고였다. 믿기 어려운 죽음. 전날 밤 김현준은 차를 수지에 있는 숙소에 세워 두었다. 이튿날 새벽 출근은 택시로 했다. 방이동 자택에서 수지로 가는 길에 중앙선을 넘어온 차가 김현준이 탄 택시를 덮쳤다.

10년 전 가을 새벽, 홀연히 떠난 ‘전자슈터’

김현준의 부음은 가족과 선후배·친구들의 일상 속에 던져졌다. 느닷없는 매질에 뒤통수를 맞고 정신을 잃는 듯한, 그런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김현준을 사랑했던 모두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그날 저녁 김현준을 태운 친구는 곧 차를 팔았다. 배호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는 아직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10년 동안 배호의 노래를 들은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가 죽어 천국에서 김현준을 만난다면 그때 배호의 노래를 다시 들을 것이다. 김현준과 함께.

김현준은 한국남자농구 명문 삼성의 레전드다. 실업농구 시절 현대와 전쟁 같은 대결을 벌이던 삼성은 김현준을 불러들여 두 차례 농구대잔치를 제패했다. 기아가 한기범-김유택-허재-강동희-김영만 등 중앙대 출신의 수퍼스타를 영입해 실업농구 판도를 석권한 80년대 말~90년대 초, 삼성은 김현준이 있었기에 끝까지 저항할 수 있었다.

잠실체육관에 걸린 김현준의 배번 10번.

김현준은 실업농구 최고의 득점기계였다. 농구대잔치 통산 238경기를 뛰면서 6063점을 기록했다. 어시스트는 712개다. 그의 득점력은 흔히 현대에서 뛰었던 이충희와 비교된다. 통산 4412점을 기록한 이충희는 경기당 득점에서만 26.7점으로 김현준(25.5점)을 조금 앞선다. 이충희는 박수교·이문규·신선우·이원우 등 일류 선수들의 지원을 받았다. 김현준 곁에는 일류 찬스 메이커가 없었다.

김현준 농구의 위대한 점은 노장이 되어 은퇴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플레이가 훌륭했던 데 있다. 경험이 쌓이면서 타고난 슛실력이 더욱 번득였다. 그는 코트 전체를 한눈에 파악하는 시야를 가졌다. 그래서 득점 전문 선수이면서도 많은 어시스트로 동료의 득점에 기여했다. 그의 통산 어시스트는 경기당 3.0개로, 허재(4.3개)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한다.
 
프로농구 첫 영구결번
시간의 힘은 강하다. 바위에 새긴 맹세마저 지워버리는 것이 시간이다. 삼성 농구단은 그들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였던 김현준의 10주기를 ‘깜빡 잊고’ 지나갔다. 일주일이 지난 뒤 안준호 감독, 서동철 코치와 강혁 등 고참 선수가 부랴부랴 용인공원묘지를 찾아 김현준의 묘소를 참배했다.

삼성 구단을, 또는 김현준의 주변 사람들을 탓할 수는 없다. 삼성 구단은 김현준과 그의 뜻을 극진하게 챙겼다. 99년 11월 9일에는 김현준의 등번호(10번)를 영구결번했다. 김현준은 프로농구에서 처음으로 등번호가 영구결번되어 홈구장에 게시된 선수다. 선홍색 유니폼에 새긴 김현준의 등번호는 삼성의 홈구장인 잠실체육관 천장에 걸렸다.

김현준을 기리기 위해 삼성 구단에서는 2000년부터 청소년 유망주들에게 장학금을 준다. ‘김현준 농구장학금’이다. 매 시즌 정규리그에서 한 경기를 이기면 그때마다 30만원씩 적립한다. 지난해까지 33명의 유망주에게 6880만원을 주었다. 첫해 장학금을 받은 양희종(당시 삼일상고)은 연세대를 나와 국가대표선수가 됐다. 삼성은 올해도 11월 말 또는 12월 초에 장학금 수여 행사를 열 예정이다.

김현준을 사랑한 사람들은 10년 하고도 한 달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곁에 있는 김현준을 느낀다. 그들에게 김현준의 의미는 단지 한 시대를 주름잡은 농구 스타가 아니다. 그들의 그리움 속에서 김현준의 이름은 사라진 낭만의 시대, 멋과 혼이 담긴 그 시절의 사랑과 우정과 땀과 눈물에 대한 그리움을 갈음한다.

그는 두주불사하는 애주가였지만 술로 물의를 빚은 일이 없다. 올 시즌 모 프로팀의 감독은 경기에 지고 나서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시민과 시비를 벌여 말썽이 됐다. 김현준은 술을 좋아했지만 단골집을 찾아가 조용히 술과 대화를 즐겼다.

김현준은 담배를 피웠다. 실업농구 시절 삼성에서 주무로 일한 전창진 KT 감독은 “경기를 앞두고 담배를 다섯 대나 피우는 걸 봤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담배가 김현준의 경기력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그는 은퇴 직전까지 신입 선수보다 더 강하게 근력운동을 했다.

김현준은 사람을 사랑했다. 그가 죽었을 때,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는 삼성은 물론 실업시절 맞수였던 현대팀 선후배가 모두 모였다. 김현준이 사랑했고, 김현준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김현준의 3년 선배 이영근이 구두에 술을 따라 영전에 바쳤다. 그렇게 이영근은 좋았던 시절의 짓궂은 장난으로 슬픔을 대신했다.
 
농구보다 사람을 사랑했다
한국 프로농구가 출범한 해는 97년이다. 90년을 전후로 프로농구 출범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런 주장은 “이충희-김현준-허재가 함께 현역으로 뛸 때가 적기”라는 판단에 기초했다. 프로농구가 출범했을 때 김현준은 현역이 아니었다. 95년 화려한 커리어를 마감하고 미국에 가 지도자 수업을 받고 96년 돌아와 삼성의 코치가 됐다. 97~98시즌 직전 최경덕 감독이 사퇴하자 감독대행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뼛속까지 삼성맨인 김현준이 오랫동안 썬더스의 벤치를 지킬 것은 자명해 보였다. 대행 시절 그가 보인 재능과 헌신은 대단했다. 그는 시즌 중 하루 세 시간도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그의 죽음으로 삼성 벤치는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졌다. 최고의 전통을 지닌 팀이면서도 순혈 삼성맨으로 벤치를 구성하기가 어려웠다. 김진·전창진·강을준 등 재능 있는 코치들이 성장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프로농구는 변화의 끝자락에 와 있다. 낭만의 시대라고 해야 할 농구대잔치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감독 가운데 안준호와 박종천을 빼면 모두 프로 시대에 지도자가 되어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농구대잔치의 마지막 순간을 화려하게 장식한 ‘마지막 승부’ 세대는 문경은-우지원-서장훈이 남았을 뿐이다. 10년이 더 지나면, 낭만은 전설로나 남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젊어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신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은 김현준은 마찬가지로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지 모른다. 아마도 농구 또는 낭만의 신이, 그를 가까이 불러 올렸을 것이다. 실력과 멋, 인간미를 모두 지닌 한 사나이의 너무 빨랐던 죽음의 의미를, 그렇게밖에는 이해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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