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장학생’ 대학강사 간첩 잡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검찰은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한 이씨의 자택 등에서 30종 160점의 증거물을 압수해 공개했다. 북한 원전과 정부기관 등에서 수집한 자료, 북한으로부터 받은 노력훈장, 노동당 당원증 등이 포함돼 있다. [수원지검 제공]

수원지검 공안부와 국가정보원은 인도 유학 중 북한 대남공작원에게 포섭돼 17년간 각종 군사기밀을 북한에 넘겨주고 공작금 5만600달러를 받은 혐의(국가보안법상 간첩, 편의 제공, 금품 수수, 특수잠입·탈출 등)로 경기도 모 대학 경찰경호행정학과 강사 이모(37)씨를 구속 기소했다고 29일 밝혔다.

정치학 박사로 정훈장교 출신인 이씨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자문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모 정당 오산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군부대에 초청받아 안보 강연을 해 왔다. 간첩이 여론 주도층으로 활동한 것이다. 북한 공작원은 이씨에게 “정계에 진출하라” “국회의원 또는 시장이 돼라”고 권유한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두 차례 밀입북=이씨는 대전에서 고교 졸업 후 1992년 인도 델리대 정치학과 재학 중 북한 ‘35호실’ 소속 공작원 이진우(56)에게 포섭돼 17년간 호형호제 해 왔다.

이씨는 93년과 95년 두 차례 밀입북해 조선노동당에 가입했으며 97년 7월부터 지난 2월까지 중국 베이징(北京), 캄보디아 프놈펜, 싱가포르, 태국 방콕에서 아홉 차례 만나 507종 5957쪽 분량의 군사기밀을 CD에 담아 북에 넘겼다.

98~2001년 육군 정훈장교로 복무한 이씨가 북에 전달한 군사기밀 중에는 육군 최상위 야전교범 ‘지상작전’과 미 육군 최상위 전투수행교범 ‘美교리100-5’ 등 전쟁 발발 시 지상전 작전계획 수립 절차와 조치 등 일종의 ‘군사작전 시나리오’가 담겨 있었다.

이씨는 2006~2007년 민주평통 자문위원 자격으로 국정원에서 열린 안보정세설명회에 참석해 보이스레코더로 3급 비밀인 설명회 내용을 녹음하고 수원공군비행장·송탄미군비행장·해병대사령부 등 국가 주요 시설의 GPS 좌표값 34개를 탐지해 북 공작원에게 전달했다. 2006년 국회의사당 모 의원 사무실에서 해외에 근무 중인 대한민국의 무관 명단도 몰래 가지고 나와 보관하고 있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이씨는 2003년 싱가포르에서 북한 지도원으로부터 노력훈장과 훈장증을 받았으며, 97년부터 올 2월까지 한 번에 600~1만 달러씩 공작금을 받았다.

 ◆디지털 장비 이용=이씨는 외국에 서버를 둔 e-메일을 이용해 공작원과 연락했다. 군부대 위치 등을 탐지한 GPS 좌표값과 군사 정보를 CD나 USB에 저장해 전달했다. 많은 자료를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웹하드를 이용한 것은 아날로그 시대 간첩의 수법과 구별된다. 검찰은 이씨의 자택 등에서 통신용 암호표, 난수 해독 책자, 북에 제공한 군사자료 등 30종 160점을 압수했다.

수원지검 윤갑근 2차장 검사는 “어린 해외 유학생 시절 포섭된 전형적인 ‘장기 우회 침투 간첩’이자 조선노동당 공작금으로 학업을 계속한 ‘장학생형 간첩사건’”이라고 말했다. 

정영진 기자

◆35호실=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직속 기구. 35호실은 조직개편 지시를 받은 날인 3월 5일을 지칭한다. 해외 공작원을 통해 김정일의 대외정책 수립에 필요한 적대국가(한·미·일)의 정보 수집, 해외 공작거점 확보 등 공작활동을 수행한다고 공안 당국은 파악한다.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1983년), 일본인 가장 국내 침투 신광수 사건(85년), KAL 858기 폭파 사건(87년), 필리핀인 위장 간첩 ‘깐수’ 사건(96년) 등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