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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총구, 2009 한국 뮤지컬 심장부를 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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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영웅’은 제작기간 3년, 제작비 37억원의 블록버스터 뮤지컬이다. 특히 길이 12m의 실제 기차 한 칸이 무대에 등장하는 하얼빈역 총격 장면이 현장감을 증폭시킨다. [에이콤 제공]

덜컹거리던 기차, "삐익-” 소리와 함께 멈춘다. 일장기를 흔드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가 총을 꺼내 든다. “탕!탕!탕!” 쓰러지는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암전, 그 어둠 속에서 들리는 외마디. “대한독립 만세”

안중근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 ‘영웅’이 26일 개막했다. 최근 트렌드와 거리가 먼듯한 칙칙한 느낌, 지나친 애국주의에 의존해 강요할 것 같은 감동,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 작품’. 작품에 대한 이런 의구심, 사실 있었다. 그러나 막상 막이 오른 지금, 판세는 180도 달라졌다. 깔끔하고 속도감 넘치며 가슴 벅차다. 해외와 겨뤄도 손색없을 만큼 ‘영웅’은 한국 창작 뮤지컬의 놀라운 진화, 그 자체였다. 이토에게 향했던 안중근의 총부리는 100년이 지난 2009년, 한국 뮤지컬의 심장부를 겨누고 있었다.

◆인간 안중근=안중근을 뒤에서 돕던 중국인 요리사 왕웨이. 안중근의 도주로를 끝내 함구해 일본 경찰에게 죽음을 당한다. 시신 앞에 선 안중근은 “조국이 무엇입니까”라며 흔들린다. 그때 들리는 어머니 음성. “운명이 때론 가혹해도 각자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단다”라며 영혼을 달랜다. 다시 옷 매무새를 가다듬는 그의 표정에 언뜻 결연함이 비춰진다.

‘영웅’은 위인전이 아니다. 우리가 이름만 알고, 역사 속에 박제된 인물로만 기억하던 안중근의 내면을 건드린다. 그의 갈등과 번민은 그의 삶을 관통하던 세계관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며 안중근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작품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안중근 역에 더블 캐스팅된 류정한·정성화가 어떤 빛깔을 내는지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류정한이 지적인 면을 강조했다면, 정성화는 소탈함이 강점이었다.

◆다이내믹한 무대=일본 경찰과 독립군의 추격신. 치고 박고 싸우는, 혹은 무조건 달리는 걸 예상했다면 오산이다. 흡사 ‘007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긴박한 음악이 깔린다. 출연진들은 호흡을 끊고, 정지했다가, 점핑하며 다리를 쭉 뻗는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격정과 스타 안무가 매튜 본의 세련미가 한꺼번에 녹아 있다. 파워풀한 남성 군무가 무대를 장악하는 사이, 미니멀한 세트가 빠르게 움직이고 그 위로 쉴 새 없이 무빙 라이트 조명이 쏴진다. 그리고 총성, “쨍그렁” 소리에 함께 영상도 깨진다. 안무와 상상력, 남성미와 첨단 무대기법이 만난 명장면이다.

◆설희, 링링 어찌할꼬=안중근과 이토의 러브 라인을 만들려고 집어넣은 가공인물인 설희와 링링은 아쉽다. 게이샤로 변신한 조선인 설희에게 이토가 왜 마음을 빼앗겼는지 설득력이 약했고, 기차 안에서 이토를 죽이려다 실패한 뒤 둘이 나누는 대화는 지나친 신파였다. 링링 역시 안중근과의 키스 장면, 총에 맞는 순간 등은 상투적이었다. 이토의 노래는 훈계조가 많았다.

◆결국은 노래=자칫 방향을 잃을 것 같은 순간마다 중심을 잡아준 건 음악이었다. 1막 후반부, 안중근의 솔로곡 ‘영웅’은 관객의 가슴을 뻥 뚫어주었고, 합창곡 ‘그날을 기약하며’는 경쾌한 비장미로 무장한, 중독성이 강한 노래였다. 2막에서 어머니가 처연히 노래를 할 땐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신예 작곡가 오상준은 풍부한 화성과 아릿한 선율을 자유자재로 오갔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던 안중근이 ‘장부가’를 토해낸다. 한국 뮤지컬 ‘킬러 콘텐트’의 탄생을 예고하는 순간 같았다.

최민우 기자

▶뮤지컬 ‘영웅’=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12월 31일까지, 4만∼11만원, 1588-7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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