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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삼칼럼] 갈곳 잃은 민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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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난감하고 곤혹스러운 사람들은 개혁을 꿈꿔왔던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지난 대통령선거 때 DJ를 선택했다. DJ가 그래도 이회창(李會昌)후보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개혁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한 결정적 요인은 물론 '지역주의' 에 있다. 호남표에 충청표가 합쳐진 것이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었음은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승리한 것인가. 호남.충청표 외에 변화를 바라는 도시영세민, 농.어촌 주민, 그리고 개혁성향의 지식층에게서 다수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더라면 DJ는 또 한번 아슬아슬하게 분루를 삼켜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α는 등을 돌린 상황이다. 지난달 18일 서울 성동.동대문.도봉.노원.마포.강서 등 6개구 8개 동에서 치러진 구의원 재.보궐선거에서는 당선자 8명 가운데 국민회의가 내천한 후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최근 잇따른 스캔들로 야당표는 똘똘 뭉친 데다 영세민표.개혁성향표도 등을 돌린 탓이라?분석이다.

정치적 비중이 낮은 선거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한다 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 6월 30일의 인천 계양-강화갑 보선, 8월 19일의 고양시장선거, 10월 4일의 청주 의원 보궐선거에서 줄줄이 여당후보가 패한 것과 연관이 없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난 대선때 DJ를 찍었다는 개혁성향의 비호남 출신 한 대학교수는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요즘 세상을 비판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자신의 논리가 뜻밖에 한나라당이나 정형근 의원의 논리와 닮아 있는 걸 깨닫고는 실소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또다른 개혁성향의 교수는 "아직도 국민회의가 한나라당보다는 더 개혁적이라고 보지만 지금 선거를 한다면 경종을 울려주기 위해서라도 야당을 찍겠다" 고 말했다.

영세민 가운데는 이 정권이 들어서면 형편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는 국제통화기금(IMF)사태가 저소득층일수록 큰 타격을 준 것이 주된 원인이라 IMF사태 후 집권한 현 정부로선 억울한 구석이 없지 않다. 그러나 어떻든 실망하고 있는 서민층이 적지 않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 이렇게 실망을 주게 됐을까. 기득권 세력의 저항□ 그런 식으로 책임을 떠넘기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기득권층의 반발이야 왜 없겠나.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반대세력일 것이다. 진짜 문제는 과거의 지지세력마저 상당수가 등을 돌린 데 있다.

현 정부가 결정적으로 실패한 것은 인사정책이다. 초기에 과거정권 인물들과 호남인사들을 중용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애써 이해하려는 쪽이었다. 구정권의 인물들을 계속 중용하는 것은 국가의 경제적 위기를 맞아 '올스타의 정치' 를 펴는 것으로, 호남인사의 다수 중용은 일단 과거의 푸대접에 대한 이해할 수 있는 보상으로 여겼다.

그런데 웬걸. 구정권의 인사, 호남인사, 심지어 재야인사까지도 요직을 맡고나선 권위주의 시대의 제도.법률.정책에 안주하고 획득한 지위를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면 '호남 편중인사' 라는 비판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랬으면 비판을 달게 받고 개혁으로써 그 비판을 상쇄하고 덮었으면 좋으련만 "뭐가 우대냐. 인구비례를 따져보자" 며 눈을 부라리니 더 인심을 잃게 된 것이다. 또 과거정권 때 고초를 겪었고 그래서 단단한 개혁의지로 정권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정권의 중심부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IMF위기 극복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라 하지만 정책기조도 뜻밖에 보수적이었다. 그러니 정권의 안에 있건, 밖에 있건 개혁세력들이 실망하고 방향을 잃은 건 당연했다.

국정운영방식도 권위주의 시절과 놀랄 만큼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좋은 보기가 검찰.경찰과 정보기관에 대한 의존이다. 그토록 피해를 본 정치세력이 왜 그들을 과감히 민주화.중립화하지 않고 의존하고 활용하는 것인지, 민주화의 진전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크게 실망했다. 요즘 현정권을 괴롭히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어떤 면에서는 자업자득이고 업보다.

위기를 느낀 정권은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권위주의 정권세력, 비호남지역 세력을 끌어들여 상황을 돌파해보려는 것 같다. 호박에 줄 그어 수박 만들어보려는 듯한 여러가지 정책적 선물과 제스처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런다고 영남의 민심이 솔깃할까. 잘못된 판단일 것이다. 현정권이 지지를 이끌어낼 데는 예나 이제나 호남.충청, 그리고 영세민과 개혁적인 지식층이 아닐까.

그렇다면 깊은 반성 위에서 다시 대선 이전의 개혁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과감한 인사를 통해 도덕적 재무장을 하고 개혁작업에 매진해야 한다. 위기를 돌파하는 길은 그것뿐이며 그것이 나라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유승삼 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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