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기획 21세기 키워드] 2. 복제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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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현대사회에서 미래사회로 넘어가는 실마리는 '복제(複製)' 라는 화두가 상당부분 풀게 된다. '기계 복제' '디지털 복제' , 그리고 'DNA복제' 의 얽힘의 관계를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 산업사회에 대한 설명의 관건이 기계 복제였다면 정보사회의 실마리는 디지털 복제(전자복사)였다. 그리고 2000년대 미래 사회의 핵심에는 DNA 복제(유전자 복사)가 놓여 있다.

산업사회는 한 시간에 수천 개의 똑같은 복제물을 만들어내는 대량생산.대량소비의 포디즘 시대였다. 이 시기의 기계는 원본의 외양을 고스란히 판박이로 복제했다. 이러한 기계 복제는 '필연' 을 기본 논리로 삼고 있었다. 최대의 효율과 이윤을 목표로 하는 기계 복제는 우연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계 복제는 끊임없는 반복이었으며, 그것은 동시에 지겨움이며 소외이기도 했다. 기계 복제는 대량으로 이뤄지지만 사람들을 고립화할 뿐 서로를 이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계 복제에는 합리와 계산, 순서와 질서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기계 복제품에는 '혼(魂.아우라)' 이 없었다. 여기에는 물론 수많은 노동자들의 땀과 지혜가 묻어있지만 영혼을 느끼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 20세기 초반의 유명한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대량생산된 기계 복제품과 현대 예술이 '아우라' 를 상실했다고 한탄한 바 있다.

하지만 디지털 복제는 정신과 마음의 산물이 복제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혼' 을 다시 잇고 있다. 디지털 복제를 통해 혼과 생각과 아이디어가 전달되고 이어지고 얽힐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네트(net)는 '영매(靈媒)' 인 셈이다. 기계 복제품이 완결된 상태에서 '닫힌' 복제의 모습으로 소비자에게 다가갔다면 디지털 복제는 타인에게 전달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열린' 복제인 것이다.

네트에서 서로간의 얽힘이 쉽게 이뤄지는 이유는 현실의 얽힘보다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선 육체의 구속이 없어 모든 것을 송두리째 걸지 않아도 된다. 네트에서의 '혼' 의 반영이 솔직한 이유는 바로 이 육체를 동반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디지털 복제는 비록 육체를 결여하고 있지만 정신의 반영에는 매우 충실할 수 있다.

DNA 복제는 모양과 내용을 동시에 복제하는 기계적 복제와 유기적 복제의 통합물이다. 앞으로 DNA 복제가 일반화되면 사람들의 정체성은 심각한 위험을 맞게 될 것이다. 자기를 판박이로 닮은 DNA 복제물들은 과연 '나' 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나' 에게 '반역' 하지나 않을까. 자신의 형식이자 본질의 반영물인 자식에게 아무 대책이 없듯이 사람들은 대책 없는 복제물에 휩싸여 자아는 물론 이웃까지 상실할지도 모른다.

기계적 복제와 디지털 복제, 그리고 DNA 복제는 그 복제의 충실도에서 보자면 점차 상승한다.하지만 거꾸로 복제물의 자율성도 커지면서 원본을 넘어 반역의 주체로 떠오를 가능성 또한 커진다.

아이가 자라나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성장하듯이 DNA 복제물의 자립성과 자율성이 커지게 되면 복제를 넘어 반역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본격화될 디지털 복제.DNA복제 시대에 대응하려면 기계 복제 시대의 패러다임을 넘어 복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백욱인 (서울산업대 교수.정보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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