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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성지 서대문 형무소…72가지 잔혹한 고문 악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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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서대문 형무소 구내 재소자 운동장(서대문형무소, 열화당, 2008). 사진 가운데 원형 감시탑을 중심으로 펼쳐진 운동공간은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설파한 규율과 감시의 패놉티시즘(panopticism)이 작동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한 1907년. 이 땅 사람들의 저항을 두려워한 통감부는 “사상범의 지도에 주안점을 둔 근대적 감옥을 착공했다.”(시게마쓰 가즈요시, 『일본감옥사』) 이듬해 10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 여러 번의 이름갈이에도 우리 머릿속 깊숙이 ‘서대문 형무소’로 박혀버린 경성감옥이 들어섰다. “여름에는 수인들의 호흡과 땀에서 나온 증기로 서로 얼굴을 분간 못한다. 겨울에는 감방에 스무 명이 있다면 면 이불 네 개를 넣어 주는데, 턱밑에서 겨우 무릎 아래만 가려지므로 버선 없는 발과 무릎은 거의 다 동창(凍瘡)에 걸린다. 귀와 코가 얼어서 극히 참혹하며, 발가락과 손가락이 물러나서 불구가 된 수인도 여럿을 보았다.” 1911년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이곳에 갇힌 김구는 그때의 혹독한 체험을 『백범일지』에 썼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심문을 맡은 일경의 첫마디가 ‘네 놈은 혈기 있고 강력한 놈으로서 신민회원이다. 기독교 신자로 우리를 가리켜 ‘왜놈 왜놈’ 하면서 우리말은 무엇이든지 듣지 않을 놈인 줄 안다. 너는 어떠한 악형을 가할지라도 불복하자는 결심을 했다는 것도 안다’고 하면서 주먹과 곤봉으로 마구 때렸다.” 같은 해 ‘105인사건’으로 수감된 선우훈의 증언처럼 일제는 독립운동가의 기개를 꺾으려 잔혹한 고문을 행했다. 손톱과 발톱 사이에 대나무 못 박기, 못을 박은 널판에 눕히기, 인두로 지지기 등 고문방법은 무려 72종에 달했다. 유관순 열사 등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이곳에서 독립을 위한 제단의 희생양이 되었다.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이 있도다.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 1920년 사이토 총독을 폭살하려다 이곳 사형장 교수대에서 빛나는 생을 마감한 강우규 의사의 유시(遺詩)처럼, 목숨을 앗길지언정 우리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정신을 빼앗기지 않았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이 땅에 봄이 다시 찾아왔건만, 그 봄볕은 이곳에는 깃들지 못했다. 1987년 문을 닫기까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의 회복을 외친 이들이 이곳에서 시대의 양심으로 우뚝 섰다. 많은 우국지사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이곳은 잡범 교화 시설이 아닌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우리 기억 속에 담겨 있다. 풍요와 자유를 누리는 다원화된 시민사회를 일군 오늘. 서대문 형무소는 우리의 가슴속 깊이 새겨둘 경구로 다가선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