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 (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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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5. '낙하산개발' 특명

71년 3월24일 주한미군 사령부는 '미 7사단을 일주일 안으로 한국에서 철수할 계획' 이라고 발표했다. 한국 주둔 26년 4개월만의 철수였다. 국방과학연구소(ADD)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국산 무기를 하루 빨리 개발해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낙하산 개발 명령이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당시 나는 국방부에 설치된 '컴퓨터 전쟁 게임팀' 에 기술자문역으로 차출, 파견 근무중이었다.

팀의 목적은 주한미군을 철수할 경우 한국군이 북한군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컴퓨터 가상 게임을 통해 미국에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총지휘는 김재명(金在明.68.전 서울지하철공사사장.예비역 소장) 육군대령이 맡았고 전군에서 50명이 동원됐다.

작업은 홍릉에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서 했다. 그시절 대형 컴퓨터, 그것도 딱 1대를 보유하고 있는 곳은 그나마 여기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기계를 다룰 줄 아는 사람도 이용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성기수(成琦秀.65.엘렉스컴퓨터 고문)당시 과학기술연구소 전산부장이 "컴퓨터를 놀리는 게 아까우니 활용 좀 해 달라" 며 내게 청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컴퓨터 사용법도 좀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컴퓨터 전쟁 게임을 해 보자고 맨먼저 주장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나는 KIST에서 컴퓨터 기술 자문과 강의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러던 어느날 오후 신응균(申應均.작고)국방과학연구소장이 급히 나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서둘러 연구소로 향했다.

申소장은 나를 보자마자 엉뚱한 질문을 했다. "韓박사, 낙하산 타 봤어□" 전혀 뜻밖이었다. "한번도 타 보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만져본 적도 없습니다." 申소장이 나를 힐끗 쳐다봤다.

현역 공군 중령이 낙하산 한 번 타 보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다는 듯한 눈치였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韓 박사, 낙하산 좀 만들어 봐!" 하는 것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나는 단호하게 "비록 공군 장교지만 낙하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뿐더러 적임자도 아니다" 고 대답했다.

그러자 申소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韓박사는 이론물리를 했잖아. 그래서 그걸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전공에 딱 맞는 사업이 없단 말이지. 연구소 사정을 잘 알 잖아. 지금 맡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네. 국방부의 지시니만큼 무조건 韓박사가 맡아 주게. 이건 명령이야!" '명령' 이란 말이 확성기처럼 크게 들렸다.

군인이란 명령 하나에 죽고 사는 존재가 아닌가. 할 수 없이 "명령이라면 맡겠다" 고 대답했다. 하지만 너무 막막했다. '국방부 지침이 뭐냐' 고 물었더니 申소장이 저간의 사정을 설명해 줬다.

69년 여름 한강에서 국산 낙하산 실험을 하던중 바클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군인 한 명이 강물에 익사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바클은 낙하산이 지상에 떨어졌을 때 사람을 낙하산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는 핵심 부품이었다.

그러니 바클 개발에 역점을 두라는 것이었다. 낙하산 개발비는 고작 1백만원이었다. 申소장은 낙하산 개발을 둘러싸고 국방부와 옥신각신했다. 국방부는 국방과학연구소 창설 즉시 낙하산을 국산화하라고 지시했다.

申소장은 연구소 내 전문가들과 여러 차례 논의를 해 봤지만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연구소가 이제 막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방부의 태도는 단호했다. 군 출신 박사들을 모아 연구소를 만들었으니 무조건 만들어 내라는 것이었다. 申소장의 고충을 이해할만 했다. 申소장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포병이지만 그보다도 선배였다. 또 국방차관과 KIST 초대 부소장을 지낸 실력가로 매우 양심적인 분이었다.

그런 분의 고충을 덜어주고 싶었다. 일단 결심이 서자 내 머리 속은 벌써 낙하산 생각으로 가득찼다.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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